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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전드 오브 풋볼] 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가 모인 ‘갈락티코 1기’ 공격수 3인방

[헤럴드경제 스포츠팀=김유미 기자] 바르셀로나의 MVP(메시-비야-페드로), MSN(메시-수아레스-네이마르)라인과 레알마드리드의 BBC(벤제마-베일-크리스티아누 호날두)라인은 역대 최강의 공격 조합 중 하나로 꼽힌다. 양 팀의 공격 라인은 팀 득점의 50% 이상을 가뿐히 넘기며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이들이 출현하기 전부터 레알마드리드에는 누가 나오더라도 득점이 보장되는 걸출한 스트라이커들이 포진한 적이 있다. 2000년 플로렌티노 페레즈가 레알마드리드 회장 후보로 출마했을 당시 막대한 투자를 약속했는데, 취임 후 그는 공약대로 빅네임들을 영입하는 데에 재정을 쏟아 부었다. 이것이 바로 페레즈 회장의 ‘갈락티코스(스페인어로 은하수) 정책’이었다. 많은 팬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선수 영입은 대체로 공격수에 쏠려 있었고 그 결과 레알마드리드는 호나우두, 루이스 피구, 지네딘 지단, 데이비드 베컴 등의 스타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빛나는 별들이 레알마드리드를 거쳐 갔다. 이번 레전드 오브 풋볼에서는 그야말로 ‘믿고 쓰는’ 선수들이 가득했던 레알마드리드의 갈락티코 1기 중 공격수 3인방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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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마드리드에서 큰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꾸준한 활약을 펼쳤던 마이클 오언. [사진=UEFA 홈페이지]


마이클 오언 - 잉글랜드에서 온 비운의 원더보이

첫 번째 주인공은 마이클 오언이다. 오언은 리버풀에서 태어나 리버풀 유소년 팀에서 스티븐 제라드, 제이미 캐러거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세였던 96-97시즌 막바지에 1군 무대에 데뷔했고, 2년차부터는 팀의 주전으로 자리매김해 36경기 18골로 될성부른 떡잎임을 입증했다. 2년차와 3년차에는 2년 연속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을 차지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동시에 잉글랜드 국가대표 팀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였다. 89번의 A매치에 출장해 40골을 기록했다. A매치에 데뷔한 첫 해 열린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페널티킥을 얻어냈고,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도 마우리시오 포체티노(현 토트넘 감독)를 상대로 페널티킥을 얻어내는 등 시뮬레이션에 능했다. 하지만 메이저 대회에서 큰 성과는 내지 못했다.

원더보이는 00-01시즌 리버풀의 컵대회 트레블을 이끈 주역이 됐고, 2001년 발롱도르 수상의 영예까지 안았다. 이후 03-04시즌까지 리버풀에서 활약하며 매 시즌 2경기 당 1골 이상에 해당하는 득점페이스를 보였다(리버풀에서 리그 216경기, 118골). 하지만 우승컵과는 인연이 없었다. 결국 그는 04-05시즌을 앞두고 낮은 이적료에 레알마드리드를 택했다(역설적으로 리버풀은 오언이 떠난 직후 04-05 챔스결승에서 ‘이스탄불의 기적’을 일으키며 우승했다).

레알마드리드에서는 호나우두, 라울 곤잘레스 등에 밀려 많은 출장을 기록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출장시간에 비하면 꽤 많은 득점을 올렸다. 04-05시즌 36경기에 나서 13골을 넣었다. 하지만 벤치 신세를 면치 못했고 그토록 원하던 챔피언스리그 우승과 주전 자리를 모두 얻지 못하자 곧장 뉴캐슬 유나이티드로 가 새 둥지를 틀었다.

오언은 뉴캐슬 사상 최고 이적료를 기록했지만 부상으로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뉴캐슬의 4시즌 동안 소화한 경기는 고작 71경기였고, 교체로 출장한 경기도 많았다. 08-09시즌 강등을 당한 뉴캐슬은 오언을 FA로 풀어줬다. 무적 신세가 됐지만 오언은 이전부터 오랜 시간 부상에 시달렸고, 소속팀이 강등 당하는 등 여러 악재가 겹쳐 새로운 팀을 찾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스스로를 홍보하는 안내책자와 영상을 배포하는 눈물겨운 노력이 이어졌고, 마침내 오래 전부터 오언을 지켜봐 온 알렉스 퍼거슨 감독에 의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로 데려왔다.

리버풀 팬들은 라이벌 팀인 맨유로 이적한 오언을 맹비난했다. 오언은 조커로 투입돼 득점을 터트리며 맨유에서 간간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세 시즌 동안 31경기에 나섰고 득점은 5골에 그쳤다. 이후 스토크시티에서 선수생활 마지막 한 시즌을 보낸 뒤 은퇴를 선언했다. 현재 리버풀 앰버서더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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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 라울 곤잘레스는 레알마드리드와 스페인의 상징과도 같은 선수다. [사진=UEFA 홈페이지]


라울 곤잘레스 - 레알마드리드의 상징, 스페인 최고 공격수

두 번째 주인공은 스페인 대표팀과 레알마드리드에서 최고의 스트라이커였던 라울 곤잘레스다. 라울은 마드리드에서 나고 자랐다. 어린 시절 아틀레티코마드리드에서 활동했는데 팀이 잠시 해체되면서 레알마드리드 유소년 팀으로 옮겨갔다. 레알마드리드 C, B팀을 거쳐 마침내 94-95시즌 프로 무대에 데뷔한다. 라울은 09-10시즌까지 총 16시즌 동안 레알마드리드의 일원으로 활동했고, 550경기 228골의 대기록을 남겼다.

그는 창의적이고 이타적인 플레이로 최전방 공격수를 돕는 섀도우 스트라이커를 주로 맡았다. 호나우두, 페르난도 모리엔테스 등과 함께 짝을 이뤄 투톱으로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98-99, 00-01시즌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고 99-00, 00-01시즌 2년 연속 챔피언스리그 득점왕에 오르기도 했다. 이 외에도 01-02, 03-04시즌 코파 델 레이 득점왕을 차지하는 등 최고의 공격력을 자랑했다.

라울은 갈락티코 1기의 핵심 공격수로, 라리가 우승 6회, 코파 델 레이, 챔피언스리그, UEFA 슈퍼컵 각 1회 우승 등 많은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3번의 챔피언스리그를 경험한 라울은 특히 01-02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맨유를 만나 두 골을 터트렸는데, 마지막 골은 쐐기골이 되어 팀의 3-2 승리를 견인했다. 2001년엔 오언에 이어 발롱도르 2위에 오르기도 했다.

1996년부터 2010년까지 7번을 달고 활약한 라울은 2003년부터 2010년까지 주장 완장을 달고 레알마드리드의 캡틴으로 팀을 이끌었다. 레알마드리드의 상징으로서 팀의 정신적 지주를 도맡았기에 ‘라울 마드리드’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강한 정신력과 뛰어난 리더십으로 스페인 국가대표 팀에서도 2002년부터 5년 동안 주장으로 활약을 이어갔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유로 2000, 2002 한일 월드컵, 유로 2004, 2006년 독일 월드컵까지 각종 메이저 대회를 모두 경험했고 A매치 102경기에서 44골을 기록했다. 하지만 소속팀만큼의 활약을 펼치지는 못했고 우승과도 인연이 없었다.

08-09시즌 레알마드리드는 페레즈 회장의 재신임과 함께 갈락티코 2기를 맞이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카림 벤제마 등을 영입하면서 공격수를 모으기 시작했다. 라울은 벤제마와 이과인의 활약에 밀려 출장 기회를 얻지 못했고, 10-11시즌 직전 당시 감독이었던 주제 무리뉴는 노장 선수들을 하나 둘 떠나보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위기를 느낀 라울은 선수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샬케04로의 이적을 택했다. 분데스리가에서는 스트라이커와 공격형 미드필더를 겸하면서 두 시즌 동안 66경기 28골의 활약을 펼쳤다. DFB 포칼컵과 DFL 슈퍼컵 우승을 경험했고, 분데스리가 이 달의 골, 올해의 골 등 수상의 영광도 따랐다. 이후 라울은 알 사드, 뉴욕 코스모스에서 총 세 시즌을 보낸 뒤 은퇴 수순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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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나우두는 화려한 개인기로 전세계에 브라질 축구를 전파했다. [사진=AP 뉴시스]


호나우두 - 원조 神, 브라질의 레전드

마지막 주인공은 축알못도 한 번 쯤은 들어봤을 그 이름, 바로 호나우두다. 화려한 개인기와 골 감각을 갖췄고 역대 최고의 센터 포워드로 불리는 호나우두는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태어났다. 1993년 크루제이루에서 프로 데뷔전을 치렀고, 첫 시즌 만에 14경기 12골의 대단한 득점력을 선보였다.

유망주로 이름을 떨친 호나우두는 U-17 대표 팀에 발탁돼 7경기 5골의 활약으로 단숨에 ‘제2의 펠레’로 부상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18살의 어린 나이에 1994년 미국 월드컵에 출전했고, 주전 선수들에 밀려 호나우두는 벤치를 지켰지만 어쨌든 브라질의 월드컵 우승을 경험할 수 있었다.

월드컵 이후 유럽 무대를 밟았다. 첫 팀은 네덜란드의 PSV 아인트호벤이었다. 당시 PSV는 팀의 주포였던 호마리우를 바르셀로나로 이적시킨 상황이었고, 호나우두는 그의 대체자로 선택된 것이었다. 네덜란드에서도 호나우두는 득점행진을 이어갔다. 데뷔 시즌에 곧바로 주전을 꿰찼고 33경기 30골을 터트리며 득점왕까지 석권했다. 2년차에는 무릎 부상으로 시즌의 절반 가까이를 재활에 쏟았지만 21경기에 나서 19골을 작성해 건재함을 과시했다. 이후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에 출전해 4골을 터트리면서 브라질에 동메달을 안겼다.

연이은 활약은 호나우두를 바르셀로나로 이끌었다. 당시 클럽 최고 이적료를 갱신하면서 입단한 호나우두는 특유의 화려한 개인기와 득점력을 선보이면서 리그 37경기에서 34골을 기록했다. 그의 활약으로 바르셀로나는 암흑기를 뚫고 리그 준우승을 차지했고, 곧바로 호나우두는 치솟은 몸값과 함께 인터밀란으로 이적했다.

호나우두는 세리에A에서도 황금기를 누렸다. 첫 시즌부터 32경기 25골로 리그 득점 2위에 올랐고, 세리에A 7공주 중에서도 세력이 약하던 인터밀란은 준우승의 좋은 성적을 거뒀다. 그 결과 1997년 자신의 커리어 첫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시즌 직후 열린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4골을 기록해 브라질의 준우승에 기여했고, 지네딘 지단을 제치고 월드컵 골든볼을 수상했다.

화려한 날들을 보냈지만 무릎 부상이 그를 괴롭혔다. 십자인대 파열로 99-00시즌부터 세 시즌 동안 17경기 출장에 그쳤다. 조금씩 “호나우두의 시대가 저물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호나우두는 재기에 성공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부상에서 복귀한 그는 대회에서 8골을 작성해 고국에 5번째 월드컵 우승컵을 안겼고, 자신은 실버볼과 골든슈를 수상했다. 또 이 대회에서의 활약으로 2002년 발롱도르 수상의 겹경사를 맞았다.

월드컵 직후 호나우두는 약 600억 원에 달하는 이적료를 기록하며 레알마드리드로 이적했다. 부상 공백이 무색할 만큼의 득점포를 가동하며 활약을 이어갔다. 초반 세 시즌 동안 매 시즌 20골 이상을 기록했다. 그러나 06-07시즌 부상과 그로 인한 체중 증가로 경기에 나서지 못하자 레알마드리드를 떠나 AC밀란으로 향했다.

AC밀란에서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두 시즌 동안 20경기를 소화하는 데 그쳤고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 2011년 코린치안스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믿고 썼던 레알마드리드 갈락티코 1기 공격수 3인방 대해서는 ‘축덕들이 만드는 팟캐스트 해축야화 46화’를 통해 자세히 들을 수 있다. 해축야화는 매주 금요일에 1부가, 토요일에 2부가 업로드 되며, 팟캐스트 어플 ‘팟빵’을 통해 들을 수 있다.

* 레전드 오브 풋볼은 축구 팟캐스트 ‘해축야화’의 한 코너입니다. 아래 URL을 클릭하면 바로 방송을 청취할 수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10698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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