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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포츠 타타라타] 운동하는 일반학생, 공부하는 운동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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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에 나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 전설적인 책이 하나 있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막노동꾼 출신의 서울대수석합격자가 쓴 책으로 1996년 8월에 초판이 나왔다. 저자가 96학번이니 출판사가 발빠르게 이 자극적인 소재를 상업화해 큰 성공을 거둔 것이다. 이 책만큼 교육열로 똘똘 무장한 우리네 부모들을 자극하고, 거꾸로 우리 아이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준 자기계발서는 없을 듯싶다. ▲ 사전과 친해져라 ▲ 완전한 이해가 중요하다 ▲ 공부의 방법은 암기다 ▲ 거북이공부법 등 따지고 보면 특별할 것이 없는 내용이지만 원체 저자의 이력이 드라마틱한 까닭에 책은 날개돋힌 듯 팔렸다. 막노동, 서울법대, 수석, 공부. 한국 사회에서 이런 단어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참 잘 먹힌다.

# 이름이 회문(回文, palindrome)인 전 청와대 민정수석은 20살에 사법고시에 최연소로 합격했단다. 공식적으로 ‘공부가 제일 쉽다’고 선언한 저자 장승수는 기대보다는 조금 늦은 2003년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지금은 제법 잘나가는 변호사라고 한다. 생뚱맞게도 그가 복싱에 푹 빠져 슈퍼플라이급 선수로 데뷔한다는 말을 듣고, 체육관으로 찾아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공부’에 대해 물으니 “그거 다 출판사의 상술이에요. 제가 정한 제목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사시를 공부하면서는 공부가 가장 쉽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얼마 전 한 기사를 보니 변호사인 그는 지금도 공부를 할 때처럼 1분, 1초를 아끼며 치열한 삶을 살고 있고, 심지어 “결국 공부가 제일 쉬운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인생의 무게가 다시 공부를 쉽게 만들었을까, 어쨌든 세상이치는 돌고 도는 것 같다.

# 공부(工夫)의 어원과 유래는 참 다양하고, 그래서 굳이 알 필요도 없다. 한자어지만 중국[??, 功?]과 일본[勉?, べんきょう]은 그 뜻으로 다른 단어를 쓰니 말이다. 단, 의미는 참 유익하다. 工은 장인이 무엇을 만드는 솜씨이고, 夫는 어른, 즉 훌륭한(혹은 완성된) 사람이 의미한다. 쉽게 말해 ‘훌륭한 사람이 만들어지는 훈련과정’ 정도로 이해하면 틀리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몸과 마음을 수련하는 중국무술인 쿵푸(후)가 우리네 발음으로 하면 공부(功夫)다. 공부의 어원 중 하나라고도 하는 공부(功扶), 즉 ‘노력해서 남을 돕다’는 의미는 따뜻한 자본주의를 논하는 요즘 시대와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 듣기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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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와 운동으로 한국사회를 뒤흔든 '비선실세' 최순실의 딸 정유라가 3일 덴마크 현지에서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 연말 한 포털사이트가 ‘한국형 대학 스포츠 희망을 쏘다’라는 특집기사를 게재했다. 10년 전 <죄송합니다 운동부입니다>라는 TV프로그램을 만들고, 그 반향이 크자 한국대학스포츠 및 초중고 학원스포츠 개혁에 앞장섰던 방송사 기자가 쓴 글이다. 그렇지 않아도 정유라(마침 외국에서 체포됐다), 장시호 등이 권력과 돈을 뒷배로 삼아, 운동을 소재로 부정하게 공부의 대가를 챙긴 게 사회적 공분을 일으킨 까닭에 그 울림이 컸다. ‘공부하는 운동선수, 운동하는 일반학생’. 지극히 당연한 이 말이 정말 멋지게 들린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네 현실이 왜곡돼 있음을 잘 시사한다.

# 기사를 접한 후 늘 하는 새해 결심으로 책이라도 열심히 읽자고 작심하고, 새해 첫 날 소설책 한 권을 읽고 자랑삼아 SNS에 이를 올렸다. ‘좋아요’를 누른 지인 중 두 명이 눈길을 끌었다. A씨는 복싱선수 출신이다. 부친이 충남의 유명한 복싱 지도자이고, 자신도 복싱특기자로 대학에 진학했다. 물론 선수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공부를 하겠다고 결심했고, 호주유학을 다녀와 영어에 능통해졌다. 영어뿐 아니라 다른 업무능력이나 사람 됨됨이도 뛰어났다. 그래서일까, 몇 년 전부터 평창동계올림픽조직위원에 발탁돼 젊은 체육행정가로 열심히 경력을 쌓고 있다. B씨는 고등학교까지 유도를 했다. 그런데 잘 못했다. 특기자로 대학에 가지 못했고, 나이트클럽 등에서 질서유지를 책임지는 밤의 세계로 입문했다. 그러다 계기가 있어 공부에 접했고, 7년 만에 서울 명문대에 진학해 이후 박사학위까지 받아 지금은 국책연구원에서 일을 하고 있다. 몸도 얼굴도 네모진 전형적인 ‘깍두기 체형’이지만 국제캠퍼스에서 영어로 강의를 할 정도로 실력이 출중한 노동전문가다.

# 운동선수 출신으로 최근 야구를 중심으로 한 스포츠산업계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저니맨’ 최익성은 연말 대한민국 스포츠산업대상 시상식에서 개인 공로상을 받았다. 신년 전화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체육인들이 자존감을 높여야 합니다. 강호동이 국민MC 반열에 오를 수는 있어도 유재석이 천하장사가 될 수는 없죠. 선수들은 현역시절 얼마나 열심히 노력합니까? 다른 일도 그 정도로 하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습니다.” 쿵푸가 공부이듯, 따지고 보면 공부가 운동이고, 운동이 공부다. 삶을 열정적으로 사는 것이 근저에 있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공부 대신 운동을 넣어도 옳은 말이다. 새해에는 공부 좀 합시다. 그리고 운동도 합시다. [헤럴드경제 스포츠팀=유병철 기자]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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