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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전드 오브 풋볼] “챔스가 가장 쉬웠어요” 2000년대 안첼로티의 AC밀란

[헤럴드경제 스포츠팀=김유미 기자] 현재 세리에A의 우승 판도는 오리무중이다. 물론 영원한 1강 유벤투스의 장기집권이 현재진행형이지만, AS로마, 나폴리, 라치오, 그리고 AC밀란이 우승 경쟁에서 큰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한때 ‘노인정’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던 AC밀란은 최근 대대적인 리빌딩으로 수년에 걸친 세대교체를 단행했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팀 평균 연령이 25세를 넘지 않는다는 점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탈리아 대표 팀에서 잔루이지 부폰의 후계자이자 골키퍼의 미래로 떠오른 10대 소년 잔루이지 돈나룸마는 이미 AC밀란의 든든한 주전 수문장으로 자리 잡았고, 가장 노화됐던 수비 포지션도 이제 막 스물을 넘긴 센터백 알레시오 로마뇰리의 활약으로 힘을 얻었다.

지난 세 시즌 동안 중위권을 전전하던 AC밀란은 어느덧 유럽대항전을 넘볼 수 있는 위치가 됐다. 세리에A 우승도 우승이지만, 무엇보다도 AC밀란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챔피언스리그 진출이 중요하다. 챔피언스리그에서 가장 많은 11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라 운데시마(스페인어로 11의 뜻)를 달성한 레알마드리드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빅이어(7회 우승)를 차지한 팀이 바로 AC밀란이다.

유럽을 호령하던 AC밀란의 최고 전성기는 명장으로 손꼽히는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이 이끌던 2000년대였다. 당시 AC밀란은 2번의 챔피언스리그 우승과 1번의 준우승을 경험했고, 세리에A 우승과 준우승 1회 등 탄탄대로를 걸었다. 이번 레전드 오브 풋볼에서는 2000년대 챔피언스리그 4강 단골이었던 AC밀란의 3인방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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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왼쪽)가 06-07 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고 있다. 이 대회에서 활약한 카카는 2007년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사진=UEFA 홈페이지]


카카 - 못하는 것 없는 엄친아

첫 번째 선수는 ‘원조 꽃미남’으로 유명한 카카다. 카카는 8살 지역 축구팀에서 축구를 시작해 15살이었던 2001년 상파울루에 입단한다. 03-04시즌에는 AC밀란으로 이적했고 08-09시즌까지 꾸준히 활약했다. 그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패스, 헤더, 슈팅, 골 결정력, 경기 조율 능력까지 모두 갖춘 만능이었고, 빠른 스피드를 이용해 전후방을 오가며 득점에 기여하기도 했다.

AC밀란으로 이적하자마자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이 시즌 30경기에 출장해 10골을 터트리면서 시즌 MVP에 선정됐다. 04-05시즌에는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을 차지했는데, 이 시즌에 자신이 AC밀란에서 활동한 8시즌 중 가장 많은 경기인 51경기를 소화했다. 06-07시즌에는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들어 올렸고, 10골을 기록한 카카는 이 대회에서의 활약으로 2007년 발롱도르를 수상했다(이후 발롱도르는 호날두와 메시에게만 주어지고 있다).

2009년 1월 잘 나가던 카카에게 맨시티가 이적료 1억 파운드, 주급 10억에 해당하는 통 큰 배팅을 시도했지만 그는 팬들의 만류에 잔류를 선택했다. 하지만 카카는 여름 이적시장에서 결국 레알마드리드로 이적했다.

레알마드리드에서는 그야말로 가시밭길을 걸었다. 잦은 부상으로 경기력은 떨어졌고 출전 기회를 받지 못하기 일쑤였다. 전성기 때의 기량이 발휘되지 않은 데다가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출전을 위해 부상을 방치한 탓도 있었다. 팀이 많은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순간에도 정작 카카는 그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설상가상, 메수트 외질이라는 대단한 이적생에 밀려나며 벤치를 지키기도 했다. 12-13시즌을 끝으로 카카는 AC밀란에 복귀했고 그가 떠난 직후인 13-14시즌 레알마드리드는 라 데시마를 달성했다.

AC밀란으로 돌아와서는 한 시즌을 뛰었다. 이 때 30경기에서 7골을 터트리며 재기 가능성을 열어 보였지만 흐르는 세월을 막을 수는 없었다. 2014년 여름 MLS의 올랜도 시티와 계약했고, 시즌 시작 전까지 친정팀 상파울루에서 임대 이적해 잠시 활동하기도 했다. 카카는 올해까지 MLS에서 두 시즌을 보냈고, 다음 시즌에는 올랜도 시티를 떠날 것이라고 밝힌 상태다.

카카는 브라질 국가대표 선수로도 오랜 시간을 보냈다. 2002년 국가대표 팀에 첫 발탁돼 한일 월드컵에 출전했고, 팀의 막내로 월드컵 우승을 경험했다. 2005년과 2009년에는 컨페더레이션스컵 우승을 이끌었고, 팀의 에이스로 10번을 달고 출전한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8강 진출을 이뤘다. 이후 메이저 대회 운이 따르지 않으면서 자국에서 열린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2016년에도 A매치 한 경기에 나섰지만 이제는 소속 팀과 대표 팀에서 모두 선수 생활 막바지에 접어든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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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첸코는 우크라이나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다. AC밀란에서 보낸 7년은 그의 전성기였다. [사진=UEFA 홈페이지]


안드리 세브첸코 - 우크라이나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


‘무결점 스트라이커’로 불린 안드리 세브첸코가 두 번째 주인공이다. 세브첸코는 우크라이나와 AC밀란을 통틀어 역대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불릴 수 있는 선수다. 소련에서 태어난 세브첸코는 우크라이나 최고 명문인 디나모 키예프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데뷔 첫 시즌에만 23경기에 출전해 가능성을 인정받았고, 리그컵 대회에서 득점왕에 오르는 활약을 펼쳤다. 2년차에는 총 38경기 19골을 기록했고 곧바로 국가대표 팀에 발탁됐다.

떠오르는 신예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고, 97-98, 98-99 두 시즌을 합해 85경기 66골의 뛰어난 성적을 거뒀다. 세브첸코를 등에 업은 디나모 키예프는 그가 몸담았던 5년 동안 리그에서 모두 우승했고, 리그컵에서도 3회 우승을 차지했다. 세브첸코를 탐내던 빅클럽들 중 AC밀란이 303억 원에 달하는 거금을 주고 그를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20년 전임을 감안하면, 상당한 금액이다.

AC밀란에서의 첫 시즌 32경기에 나서 24골을 넣었고, 리그 득점왕과 올해의 외국인 선수 타이틀을 독차지했다. 득점 능력에서 탁월한 선수였기에 ‘남미에는 호나우두, 유럽에는 세브첸코’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그의 활약 덕분에 AC밀란은 02-03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세브첸코는 AC밀란에서 보낸 7년 동안 296경기에서 173골을 넣으며 전성기를 누렸다.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낸 세브첸코는 큰 기대 속에 첼시로 이적한다. 당시 그의 위상을 증명하듯, 이적료는 약 700억 원을 호가했다. 하지만 첼시에서 세브첸코는 완전히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골 결정력을 잃어버리며 평범한 선수로 전락했고, 매 시즌 한 자릿수 득점을 기록하면서 기대 이하의 성적을 냈다. 08-09시즌 첼시는 세브첸코를 AC밀란으로 돌려보냈지만 예전의 기세는 찾기 힘들었다. 결국 다음 시즌 친정팀인 디나모 키예프로 이적해 세 시즌을 보낸 뒤 은퇴했다.

전성기 시절 최강으로 불리던 그였지만 ‘불운의 스트라이커’라는 별명도 따라붙었다. 고국인 우크라이나 대표 팀이 메이저 대회에 출전하지 못하면서 세브첸코의 활동 무대가 좁아진 탓이었다. 하지만 2006년 독일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끌었는데, 예선에서 6골을 터트리며 본선 진출의 일등 공신이 됐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은 우크라이나의 역사상 첫 메이저 대회였다.

월드컵 본선에서 8강까지 진출했다. 세브첸코는 조별리그에서 가장 중요했던 튀니지 전에서 결승골을 작성해 이름값을 톡톡히 해냈다. 16강에서 한국을 꺾고 올라온 스위스와 만나 승부차기 끝에 간신히 승리했는데, 세브첸코는 1번 키커로 나서 실축을 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8강에서는 이탈리아를 만났고 부폰을 극복하지 못한 세브첸코의 우크라이나는 결국 0-3으로 패배하며 대회를 마감했다.

선수로서 말년이 다소 불운했고, 국가대표 팀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세브첸코의 업적은 무시할 수 없다. 우크라이나 올해의 선수상 6회, 챔피언스리그와 세리에A 득점왕 2회, 발롱도르 1회 등 개인 수상만 40건을 넘어간다. 은퇴 후 정계에 진출했지만 낙선으로 고배를 마셨고, 골프선수로 전향한 후에도 대회 전체 꼴찌를 차지하면서 체면을 구겼다. 다시 축구계로 돌아온 세브첸코는 현재 우크라이나 대표 팀 코치직을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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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디니는 AC밀란에서 5번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경험했다. 02-03 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말디니. [사진=UEFA 홈페이지]


파올로 말디니 - 밀라노의 아들, AC밀란의 전설

AC밀란의 전설적인 선수로 남아있는 파올로 말디니가 마지막 주인공이다. ‘세계 4대 수비수’이자 최고의 왼쪽 풀백으로 꼽히는 말디니는 AC밀란의 ‘원 클럽 맨’이자 진정한 전설이다. 밀라노에서 태어난 말디니는 고향 팀인 AC밀란에서 축구를 시작했고, 은퇴할 때까지 AC밀란의 유니폼만을 입었다. 5대가 모두 AC밀란에 몸담았거나 몸담고 있는데, 그의 아버지인 체사레 말디니는 AC밀란의 레전드 출신이며, 파올로 말디니의 아들인 크리스티앙과 다니엘 역시 유소년 팀에서 활동한 기록이 있다. 체사레 말디니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역시 AC밀란에서 선수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디니는 1985년 만 16세의 나이로 성인 무대에 데뷔했고, 프로 2년차였던 85-86 시즌부터는 주전 자리를 꿰찼다. 큰 부상 없이 매 시즌 꾸준한 모습을 보인 그는 AC밀란에서 리그와 대회를 포함해 총 902경기에 출장했다. 거친 플레이가 잦을 수밖에 없는 수비수, 그것도 어느 정도의 활동량이 뒤따르는 풀백 포지션이었지만 20년이 넘는 선수 생활동안 퇴장은 단 두 번에 불과할 정도로 깔끔한 플레이를 선보였다.

또한 말디니가 AC밀란에서 활약하던 시기와 팀의 전성기가 맞물리면서 말디니는 챔피언스리그 5회, 세리에A 7회, FIFA 클럽 월드컵 3회 우승 등 화려한 커리어를 쌓았다.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프랑크 레이카르트, 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 등 오렌지 삼총사가 있던 AC밀란의 첫 황금기와, 2000년대 카카, 세브첸코 등과 함께 일군 두 번째 황금기까지 그는 두 번의 밀란 제너레이션을 모두 경험한 셈이다.

이탈리아 국가대표 팀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쳤지만 유독 우승컵과는 인연이 없었다. 말디니는 총 126번의 A매치를 치렀다. 1988년 A매치 데뷔전을 치렀고 같은 해 유로 1988과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참가해 모두 4강 진출에 성공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월드컵 단일 대회 최장시간 무실점을 기록했다. 비록 자국에서 열린 대회를 3위로 마감했지만 골키퍼 왈테르 젠가를 비롯한 수비 라인은 팀 역사상 최강의 수비진으로 평가 받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는 16강에서 한국을 만나 연장전 안정환에게 골든골을 허용하며 탈락했는데, 이때 안정환의 전담 마크를 맡은 선수가 바로 말디니였다. 그는 동료 선수들의 부상과 경고누적으로 본래 포지션이 아닌 센터백으로 출전해 결국 실수를 범했고 훗날 말디니는 이 대회를 자신의 최악의 대회로 꼽기도 했다.

말디니는 2002 한일 월드컵을 끝으로 대표 팀에서 물러났고, 08-09시즌을 끝으로 25년간 몸담았던 AC밀란과 작별을 고했다. 은퇴 후 그는 2015년 북미 축구리그 NASL의 마이애미FC의 구단주가 됐으며, AC밀란과 이탈리아 대표 팀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본인의 후계자 알레산드로 네스타를 감독으로 앉힌 상태다.

챔피언스리그 4강 단골이었던 2000년대 안첼로티의 AC밀란 3인방 대해서는 ‘축덕들이 만드는 팟캐스트 해축야화 46화’를 통해 자세히 들을 수 있다. 해축야화는 매주 금요일에 1부가, 토요일에 2부가 업로드 되며, 팟캐스트 어플 ‘팟빵’을 통해 들을 수 있다.

* 레전드 오브 풋볼은 축구 팟캐스트 ‘해축야화’의 한 코너입니다. 아래 URL을 클릭하면 바로 방송을 청취할 수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10698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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