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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전드 오브 풋볼] 영국전역에서 모여 명가를 재건한 ‘60년대 맨유 공격수 3인방’
[헤럴드경제 스포츠팀=김유미 기자] 지난달 28일 브라질 프로축구팀 샤페코엔시 선수단을 태운 전세기가 추락하는 충격적인 사고가 발생했다. 4부 리그에서 시작해 1부 리그까지 승격하는 기적을 이룬 샤페코엔시 선수들은 그토록 바라던 코파 수다메리카나 결승전을 치르기 위해 떠났지만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이번 샤페코엔시 팀의 사고는 또 다른 비행기 사고를 상기시킨다. 세계 축구사를 흔든 충격적인 사건 사고들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바로 1958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의 ‘뮌헨 참사’다. 뮌헨 참사는 맨유에게 그야말로 비극이었다. 8명의 주축 선수와 주요 코칭스태프를 잃었고, 사고 직전까지도 승승장구하던 팀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당시 생존자였던 맷 버스비 감독은 좌초한 맨유를 예인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마침내 67-68시즌, 맨유는 클럽 역사상 첫 유러피언컵(현 챔스)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두 번째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 시기, 영국 각지(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에서 모여 맨유를 이끌었던 공격수 3인방이 이번 레전드 오브 풋볼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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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출신의 데니스 로는 맨유를 대표하는 10번 선수였다. [사진=UEFA 홈페이지]


데니스 로 - 스코틀랜드에서 온 ‘The King’

데니스 로는 맨유에서 에릭 칸토나에 앞서 ‘King(왕)’ 칭호가 붙었던 선수였다. 1940년 스코틀랜드 애버딘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풀백 포지션을 소화하기도 했다. 그러다 왼쪽 윙으로 자리를 옮겼고, 투지 넘치는 플레이 스타일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양발, 정확한 헤더 슈팅으로 빠르게 공격수 포지션에 적응했다.

1956년 허더즈필드 타운에서 데뷔해 1960년 맨체스터 시티(이하 맨시티)로 이적했다. 맨시티에서 두 시즌을 보낸 뒤 토리노로 이적했고, 1시즌 동안 28경기 10골을 기록했다. 세리에A를 뒤로 하고 데니스 로가 눈을 돌린 곳은 잉글랜드였다. 1958년 뮌헨 참사로 많은 선수들을 잃은 맨유를 살리려 애쓰던 맷 버스비가 로를 불러들이면서 62-63시즌 맨유로 이적했다. 당시 영국 선수로는 최고 이적료인 11만 5,000파운드를 기록했다.

첫 시즌에만 23골을 넣은 로는 맨유를 대표하는 10번이 됐다. 다음 시즌에도 30골을 터트렸고 계속해서 활약을 이어갔다. 프리미어리그 2위에 올랐던 63-64시즌, 로는 42경기에 출장해 46골을 기록하면서 그해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조지 베스트, 보비 찰튼과 함께 무시무시한 공격 트리오 ‘붉은 악마(Red devils)’을 구성한 맨유는 64-65, 66-67시즌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1964년부터 4년 간 로는 맨유의 캡틴으로 활동했고, 67-68시즌 맨유는 사상 첫 유러피언컵 우승을 달성했다. 당시 로는 무릎 부상으로 결승에 함께하지 못했다. 고질적인 부상에 시달리면서 기량이 떨어진 로는 72-73시즌을 끝으로 맨유를 떠났다.

그의 마지막 행선지는 맨시티였다. 공교롭게도 맨유는 이 시즌 강등의 문턱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맨체스터 더비에서 맨유를 만난 로는 결승골을 터트려 맨유를 2부 리그로 내려보냈다. 맨유의 레전드를 바라보는 팬들의 입장에서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로는 이 시즌 24경기를 소화한 뒤 은퇴했다.

국가대표 커리어는 1958년에 시작했다. 대표 팀에서 은퇴한 1974년까지 총 55번의 A매치에서 30골을 기록했다.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는 발탁되지 못했고, 1974년 서독 월드컵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30골은 A매치 102경기르르 소화한 케니 달글리시와 함께 역대 스코틀랜드 대표팀의 공동 최다득점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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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유의 7번'으로 기억되는 북아일랜드의 레전드 조지 베스트. [사진=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홈페이지]


조지 베스트 - 맨유의 넘버 세븐

조지 베스트는 드리블이 일품인 선수였다. 슈팅도 뛰어나 윙어의 자질을 두루 갖춘 선수로 모두에게 인정받았다. 빠른 스피드를 살리며 드리블로 상대 진영을 휘젓는 베스트의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춤을 추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장발에 수려한 외모로 소녀 팬들을 몰고 다녔다. 이 때문에 축구계의 슈퍼스타, ‘비틀즈 제5의 멤버’ 등의 별명을 얻기도 했다.

뮌헨 참사 이후 맨유는 각국에 스카우트를 파견했다. 그 중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에 파견됐던 밥 비숍은 당시 15살이던 조지 베스트를 발견했고, 맷 버스비 감독에게 “천재를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맨유에 입단한 어린 베스트는 향수병을 앓았고, 팀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팀을 무단으로 이탈해 고향에 돌아가는 일도 자주 일어났다. 베스트는 팀에 매 주 경기가 끝난 후 벨파스트로 돌아가는 비행기 티켓을 마련해 달라는 당돌한 제안을 했고, 그의 재능을 크게 평가한 버스비 감독은 이를 수락했다.

이런 베스트는 17살에 마침내 맨유에서 데뷔했다. 이후 11시즌 동안 팀의 주축으로 활약하며 공격을 이끌었다. 베스트가 활동하던 당시 맨유는 리그 2회 우승을 달성했고, 특히 67-68시즌 그는 28골을 터트리며 득점왕에 올랐다. 또 67-68시즌은 맨유와 베스트 모두에게 뜻 깊은 시기였다.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벤피카를 4-1로 꺾고 사상 첫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결승에서 득점을 기록한 조지 베스트는 1968년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많은 사랑을 받은 그였지만 버스비 감독이 떠난 뒤 술에 의존하는 날들이 늘어갔다. 맨유에서 갑작스런 은퇴 선언을 한 뒤 도망치기도 했고, 음주운전, 경찰 폭행 등으로 체포된 적도 있다. 맨유에서 474경기 181골을 기록한 베스트는 73-74시즌을 끝으로 맨유와 이별했다. 말년에는 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한 채 스코틀랜드, 미국, 호주 등 10여 곳의 팀을 전전한 후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후에도 어두운 날의 연속이었다. 두 번이나 이혼을 당했고, 알코올 중독으로 2002년 간 이식 수술을 받기도 했다. 결국 그는 2005년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망 직후 잉글랜드의 모든 축구장에서는 1분 동안 묵념을 진행했고, 그의 고향인 벨파스트에서는 운구차를 따라 10만 명의 사람들이 조지 베스트의 마지막을 애도하기도 했다. 2006년 벨파스트 시티 공항은 베스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지 베스트 벨파스트 시티 공항으로 개칭했고, 같은 해 얼스터 은행은 그의 초상화가 그려진 5파운드 지폐를 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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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비 찰튼은 맨유와 잉글랜드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사진=FIFA 홈페이지]


보비 찰튼 - 잉글랜드의 살아있는 전설


1994년 기사 작위를 받아 찰튼 ‘경’으로 유명한 보비 찰튼은 잉글랜드 출신 공격수였다. ‘그라운드 위의 노동자’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많은 활동량을 자랑했고, 수준급의 테크닉을 갖춘 선수였다. 특히 양발을 사용한 킥은 당대 최고로 꼽힌다.

찰튼은 1956년 10월 19살에 맨유에서 데뷔했다. 데뷔전에서 멀티골을 터트렸고, 첫 시즌 14경기에 나서 10골을 기록하면서 리그 2연패에 일조했다. 찰튼이 주축으로 성장하고 있던 1958년, 맨유는 유러피언컵 8강을 마치고 서둘러 잉글랜드로 귀국하던 도중 뮌헨에서 일어난 비행기 사고로 선수단 대부분을 잃었다. 찰튼은 당시 생존자였다.

충격에 휩싸인 맨유는 사고 이후 열린 유러피언컵 준결승에서 AC밀란에 패배했고, 이 시즌 무관에 그쳤다. 사고를 딛고 일어선 찰튼은 1958년 본인의 A매치 데뷔전에서 득점을 신고했고, 58-59시즌 리그에서만 29골을 기록하는 맹활약으로 맨유의 리그 준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1963년에는 FA컵에서 우승했고, 64-65, 66-67시즌에는 리그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앞서 설명한 68-69시즌 유러피언컵 결승에서는 멀티골을 기록했다.

잉글랜드 대표팀에서의 활약도 대단했다.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 주전으로 출전한 찰튼은 아르헨티나와의 16강에서 기록한 득점으로 잉글랜드의 8강 진출에 큰 공을 세웠다. 전성기는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이었다. 조별예선 멕시코 전에서 환상적인 중거리 슈팅으로 득점포를 터트린 찰튼은 최대 고비였던 준결승 포르투갈 전에서 당시 최고의 스트라이커였던 에우제비우를 제압하는 명장면을 남겼다. 잉글랜드는 프란츠 베켄바워가 속한 서독을 꺾고 월드컵 트로피를 들어 올렸고, 찰튼은 대회 최우수 선수 선정과 1966년 발롱도르를 수상의 겹경사를 맞았다. 찰튼은 잉글랜드 국가대표로 109경기에서 49골을 기록했는데 이 기록은 이후 웨인 루니에 의해 경신된다. 하지만 여전히 맨유에서 기록한 최다득점 기록(리그 199골, 대회 포함 249골)은 깨지지 않고 있다.

찰튼은 72-73시즌을 끝으로 맨유와 작별한다. 프레스턴 노스엔드에서 감독 겸 선수로 한 시즌을 보냈고, 75-76시즌 워터포드 유나이티드에서 3경기를 소화한 뒤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그는 위건에서 이사직과 감독대행을 지낸 뒤 1984년부터는 맨유 보드진에서 기술 이사직을 지내고 있다.

영국 전역에서 모여 명가를 재건한 60년대 맨유 공격수 3인방에 대해서는 ‘축덕들이 만드는 팟캐스트 해축야화 42화’를 통해 자세히 들을 수 있다. 해축야화는 매주 금요일에 1부가, 토요일에 2부가 업로드 되며, 팟캐스트 어플 ‘팟빵’을 통해 들을 수 있다.

* 레전드 오브 풋볼은 축구 팟캐스트 ‘해축야화’의 한 코너입니다. 아래 URL을 클릭하면 바로 방송을 청취할 수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10698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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