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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건식의 도의상마] 유도가 ‘노골드 수모 대상’이 되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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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랭킹 1위로 기대를 모았지만 리우 올림픽에서 16강에서 탈락하고 만 안창림.


올림픽에서 동양을 기원하는 하는 종목은 유도와 태권도뿐이다. 리우 올림픽의 한국 유도가 노골드의 수모(?)를 겪고 있다. 이 두 종목에 대해서는 올림픽에서 금메달 효자종목으로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큰 분위기다. 그런데 유도의 역사를 살펴보면 올림픽에서 기대에 못 미쳤다고, 종주국 일본에 뒤졌다고 폄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유도는 세계인의 스포츠

유도가 일본이 종주국이고 강국이라고는 하지만 120여 년이 넘은 현대유도는 이미 전 세계 각국이 고른 기량을 보이며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을 정도로 평준화 양상을 띠고 있다. 1980년대 일본이 ‘힘의 유도’를 앞세워 세계 유도계의 흐름을 변화시켰고, 1990년대에는 구소련 독립국가들의 기술에 일본의 정통유도가 무너졌다. 수많은 변칙기술과 응용기술이 발달하고, 정해진 경기규칙 내에서 다양한 전술이 개발되면서 올림픽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연출하곤 한다. 태권도에 앞서 이미 세계인의 스포츠가 된 것이다. 반일감정으로 그 가치를 손상해서는 안 되는 스포츠다.

한국에 현대 유도가 유입된 시기는 1906년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가 명동의 한 창고에 우치다(內田) 도장을 개설하면서부터다. 이 도장은 당시 헌병, 경찰, 그리고 교도관들을 대상으로 유도를 지도했다. 우치다는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주도한 초대 조선통감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와 함께 일본의 국수주의 단체 흑룡회(黑龍會)를 이끌면서 일제의 대륙침략 정책과 군국주의 여론에 큰 영향력을 미친 인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9년 YMCA에 유도반을 개설할 때 독립운동가인 이상재 선생은 장사 100명을 육성하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우리와 일본의 유도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는 현대 유도의 효시인 강도관유도(일본)가 생긴 지 20여 년이 넘은 시점으로 아직 유도가 체계화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초창기 한국유도는 씨름장사들이 유도기술을 배워 선수로 나섰기 때문에 일본선수들에 비해 체력이나 기량 면에서 우수했다고 한다.

초창기부터 일본에 앞섰던 한국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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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도 10단' 고 이제황 사범.


당시 우치다 도장 관원과 YMCA 유도반 수련생 간의 충돌은 없었으나, 보이지 않는 경계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유도가 유입된 지 11년 후인 1917년 일본은 지금의 한화빌딩 뒤에 위치한 소공동에 대지 372평과 목조 217평 규모의 강도관조선지부인 ‘중앙도장’을 설치했다. 경찰과 헌병, 교도관이 중심이 된 일본유도와는 달리, 민족유도를 강조한 국내 유도인(YMCA의 유도반 출신과 무관학교 출신)들이 유도장을 추가로 개설하려고 하자 일제는 강도관조선지부를 만들어 기선을 제압하려한 것이다.

하지만 1921년 강낙원에 의해 조선무도관이 설립되고, 인천 등에도 무도관이 설립되면서 우리 유도의 기세는 커져 갔다. 1931년에는 이경석에 의해 조선연무관이 문을 열고, 1932년에는 조선유도연맹회가 조직되었으며, 1934년에는 조선유도유단자회가 결성되면서 크게 활성화됐다. 이러한 흐름을 차단하기 위해 일제는 1938년에 모든 도장을 강도관 조선지부로 강제 통합해 해방전까지 유지했다.

해방이 되자, 강도관조선지부는 문화관리국으로 넘어갔고, 1950년 9.28 서울수복 때 대한연무관으로 넘어 간다. 1953년 6월 한국전쟁이 끝나고 대한유도학교와 대한유도회, 그리고 한국유도원이 주도권을 놓고 경합하는 복잡한 관계가 형성됐다.

대한유도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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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동시절 대한유도학교 정문.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대한유도학교다. 유도 명문으로 알려진 용인대학교의 전신인 이 학교의 설립자는 YMCA 출신으로 민족유도를 배운 이제황 사범이다. 이 사범은 광복군 출신으로 육군 창설의 주역인 이범석 장군과 함께 유도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하지만 소공동 유도학교는 순탄할 수 없었다. 유도학교인 소공동 중앙도장이 공개입찰 끝에 애경유지에 평당 27만 5,000원에 매각처분되면서 1969년 4월 명도소송에서 유도학교 측이 패소했다. ‘건물 없는 학교’로 전락한 것이다. 이에 유도학교는 성동구 구의동 아차산 영화사 부근에 도장을 짓었지만, 불법 건물이라는 이유로 1972년 풍납동으로 이전해 운영됐다. 결국 1985년 지금의 용인캠퍼스로 이전했다.

반면 한국유도원은 중앙도장의 신축대지를 반납하는 조건으로 보조금을 받아 여의도의 대지 2,410평을 매입, 이전하게 된다. 이러한 당시 상황을 놓고 유도학교와 유도원의 갈등의 근원은 당시 유도계에 있던 YMCA 출신과 일본유학파의 갈등으로 보고 있다.

1970년대까지 대한유도회 및 한국유도원은 대한유도학교와 지속적인 갈등을 빚었다. 하지만 대한유도학교 출신들이 대한유도회 이사회의 과반수를 차지하면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일부에서 유도가 용인대의 독식이라며 비판하기도 하지만 용인대 유도의 역사는 종로 YMCA유도의 민족학교로 출발했고, 해방 이후에 수많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살아남아 세계 최강의 무도특성화대학으로서 자리하고 있다.

유술이 아니라 유도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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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대학교 무도대학 전경.


현대유도의 창시자 가노 지고로 사범은 유술이 유도로 승격된 것에 대해 술(術)에서 도(道)로의 전환은 평화와 건강의 원리를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역설했다. 술(術)은 사람을 상대하기 위한 기술로서 힘의 과시를 주제로 한 폭력의 원리(공격적)이지만, 도(道)는 폭력을 부정하는 평화의 원리로서 순수한 방어논리(나를 지키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유도학교를 만든 이제황 사범도 유도학교의 이념을 ‘도의를 갈고 닦아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인간이 되자’라는 무예철학을 제시했다.

올림픽 유도가 노골드라고 유도계에 매서운 눈총을 주어서는 안 된다. 일본 유도를 꺾기 위해 민족유도를 하던 시기 일본 순사를 상대로 메치기를 해 이기는 것은 우리 국민의 아픔을 풀어주는 활력소였다. 그리고 올림픽의 금메달에 목이 타던 시절에는 우리 국민들에게 스포츠를 통한 강국이라는 자부심을 심어 주었다. 이러한 세월에 유도는 다른 어떤 종목보다도 많은 금메달을 안겨준 효자종목이었다.

현대유도를 만든 가노 지고로 사범과 민족유도를 강조하며 한국 유도교육의 선구자였던 이제황 사범이 이야기한 공리(公利)는 일본이나 우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랜 수련을 통해 올림픽이라는 단 몇 분의 시간으로 우리 젊은 유도선수들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유도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보급하고자 하였는지에 대해 초심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때다. 일시적으로 술(術)이 조금 기대에 못 미치면 어떤가? 지속적으로 도(道)를 잘 지키면 그만이지 말이다. 영화대사처럼 ‘정말 뭐가 중헌지’ 생각해 봤으면 한다.

*허건식 박사는 예원예술대학교 경호무도학과와 부설 국제TSG연구소 특임교수로 재직 중이며, 2016청주세계무예마스터십조직위원회 수석전문위원, 국립태권도박물관 운영위원, 대한무도학회 상임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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