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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섭의 링사이드산책] WBC 슈퍼밴텀급 챔피언 염동균의 라이프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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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11월 세계챔피언에 등극한 염동균,


지난 수요일 부천의 한 호텔 커피숍으로 염동균 씨를 취재하러 떠났습니다. 그는 제가 6개월 정도 모셨던 직장상사였고, 제 제자인 최요삼을 세계 정상에 등극시키는 데 일조했던 미리노 프로모션의 사장이기도 했습니다. 잘 아는 복싱계 선배였기에 당연히 따로 만나지 않아도 한 편의 글은 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글은 역시 발품을 팔아서 써야 생동감이 넘친다는 하일성 야구해설위원의 말처럼, 일부러 시간을 내 독대했고 주옥같은 스토리를 3시간에 걸쳐 경청하게 됐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복싱입문

한국 프로복싱의 4번째 세계챔피언인 염동균은 1950년 11월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충북 옥천은 당시 관산성으로 불리웠고, 여기서 백제 성왕이 신라 진흥왕과 한판 승부를 벌이다 포살되어 죽임을 당하고, 120년 동안 지속되어 오던 나제동맹이 두 동강 난 역사의 현장이죠. ‘옥천사람’ 염동균은 5살 때 대전으로 이사했고,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대전 한밭체육관(관장 이수남)에서 복싱을 입문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보문중학교 1학년 때 충남선수권대회 핀급(39KG급)에서 우승, 가능성을 보였고 충남기계공2학년이던 1968년 호남선수권대회 결승에서 이거성(남성고)과 맞대결을 펼쳐 비록 패했지만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염동균은 1969년도 제50회 전국체전 결승(밴텀급)에서 서울대표인 최재호에게 판정으로 패했지만 값진 준우승을 차지했고(최재호는 프로에서 맞붙었는데, 염동균이 한국타이틀 9차 방어전에서 7라운드 KO승으로 설욕했습니다). 이듬해 3월 충북대학에 입학이 예정돼 있었지만 뜻한 바가 있어 방향을 틀어 프로세계에 뛰어들었습니다.

전무후무한 기록 ? 한국타이틀 14차 방어

1971년 10월 16전째 홍성종을 꺽고 한국챔피언에 등극한 염동균은 이 타이틀을 무려 14차나 방어,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불멸의 기록을 세웠습니다. 1971년 18전째 염동균은 괌으로 원정을 가 3형제 복서로 유명한 조 살로마에게 첫 패배를 당했습니다. 하지만 과거 유제두가 임병모에게 패한 이후 36전 무패행진을 기록했듯이 염동균도 이 패배를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기록적인 35게임 연속 무패기록을 이어갑니다. 33승 2무였는데, 무려 17KO승을 거둘 정도로 일발필도를 뽐냈습니다. 당시 플라이급의 간판선수이자 같은 동신체육관 동료였던 김학영은 염동균에 대해 “주먹도 묵직했고, 파이팅도 뛰어난 복서”였다고 평가했습니다.

1974년 염동균은 멕시코 올림픽 동메달리스트이자 당시 동양 주니어페더급 챔피언인 장규철(1946년생, 작고)의 6차방어전 도전자로 나서 군말없는 판정으로 꺽고 동양 타이틀 획득에 성공합니다. 1975년 11월 일본 동경에서 다나카 후타로를 상대로 5차 방어에 성공하지만 이 경기에서 염동균은 오른손이 골절되는 치명상을 입고 맙니다.

그런데 이후 그의 변신이 놀랍습니다. 부상 이후로 강한 라이트 훅을 쓸 수 없었던 염동균은 발레리나처럼 경쾌한 스텝을 밟으며 치고 빠지는 아웃복서가 됩니다. 링 위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던 것이었지요. 이 발레리나 같은 스텝을 구사하기 위해 남산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도록 스텝 연습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왜곡판정 탓에 실패한 첫 정상도전

그리고 운명의 1976년 8월 1일. 이날은 염동균이 첫 세계 타이틀매치를 펼친 날입니다. 이 날 아침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한국의 양정모가 자유형 62kg급에서 건국 이래 최초의 금메달을 획득한 기념비적인 날이었습니다. 이 WBC 슈퍼 밴텀급 타이틀에 도전할때 염동균은 27살이었고, 53전 46승 6무 1패 21KO승을 기록 중이었죠. 상대 파나마의 리르베르고 리아스코는 23살로 36전 23승 12KO승 4무 9패를 기록한, 그다지 위협적인 챔피언은 아니었습니다. 이 경기에서 염동균은 시종일관 주도권을 잡고 전 라운드에 걸쳐 우세한 경기를 펼쳤지만 래리 로자딜라(미국, 2003년 사망)의 만행에 가까운 부정 답안지(?)에 의해 첫 도전은 우여곡절 끝에 판정으로 패했습니다.

당시에는 채점표가 지금처럼 라운드 별로 공개되지 않았고, 주심이 보관하고 있다가 경기가 종료된 후 공개되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황당한 채점을 중간에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 경기 이후 라운드 별 채점표 공개가 실시됐다고 합니다. 당시 챔피언의 파이트머니는 8만 5,000달러(한화 4,200만 원)이었습니다. 아까운 외화만 낭비한 경기로 기억되는 한판이었습니다.

역대 네 번째 한국의 세계챔피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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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 로얄 고바야시(일본)와 일전을 벌이는 도전자 염동균(왼쪽),


이후 리아스코는 일본의 로얄 고바야시(23전 21승 18KO승 2패)에게 8라운드 KO패를 당하며 타이틀을 넘겼죠. 염동균은 1976년 11월 24일 장충체육관에서 두 번째 세계도전에 나서 1라운드 다운을 뺏는 선전 끝에 2-0 판정승을 거뒀습니다(당시 3명의 심판 중 2명이 일본인으로 배석을 했는데, 한 심판이 146-144로 염동균의 승리를 선언했죠. 그 양심적인 심판은 모리다 겐 이라는 분이었습니다). 참고로 고바야시는 일본 최초의 대학생 세계챔피언이었고, 1972년 뮌헨 올림픽 국가대표였습니다.

염동균은 1977년 2월 그 유명한 콜롬비아 최초의 세계챔피언인 안토니오 세르반테스의 친동생인 호세 세르반테스를 상대로 1차 방어전을 치러, 특유의 아웃복싱으로 착실히 득점을 올리며 타이틀을 지켜냈습니다. 하지만 그해 5월 당시 17연속 KO승을 거두었던 푸에르토리코의 윌프레드 고메즈와 벌인 원정 2차 방어전에서 1라운드에 레프트 훅을 안면에 강타하여 쾌조의 스타트를 끊었지만 12라운드 KO패를 당함으로써 벨트를 풀었습니다. 이후 고메즈는 17연속 세계 타이틀 KO방어기록을 세우면서 월드스타로 부상합니다. 고메즈와의 경기에서 염동균은 1라운드에 다운을 빼앗은 후 무리하게 라이트 훅을 공격하다가 그만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부러졌다고 합니다. 경기가 끝나고 글러브를 벗을 때 손이 퉁퉁 부어 잘 빠지지 않았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고메즈 측이 경기장 링이 푹신푹신하게 만들어 놓아 아웃복서인 염동균은 무더운 날씨와 함께 이중고를 겪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염동균은 “고바야시는 맞으면 아픈 펀치였다면, 고메즈의 펀치는 맞으면 몸이 붕 뜰 정도로 가공할 위력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홍수환과의 1패1무

이후 염동균은 링을 떠나 당시 받은 파이트머니 3,000만 원으로 강남 모처에 주점을 차리고 제2의 인생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당시 500만 원의 급전이 필요한 상황이 발생했고, 때마침 WBA에서 J.페더급이 새로 신설되면서 염동균-홍수환 경기가 열리게 됐습니다. 그때가 1977년 6월이었습니다. 다 아시다시피 고메즈와 세계타이틀 매치를 치른 후 불과 한 달 만에 이루어진 경기라 염동균은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결과는 판정패였습니다. 아무튼 염동균은 1982년 12월 홍수환과 2차전을 끝으로 복싱계를 떠납니다. 이 경기도 염동균이 2년 2개월 만에 컴백한 후 치른 경기로 무려 15kg 감량해야했죠. 그가 최후의 불꽃을 태웠던 이 경기는 주도권을 잡은 염동균이 우세했습니다. 하지만 심판들은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하는 두복서에게 사이좋게 무승부를 선언했습니다. 그의 나이 31살 때의 일이었고, 그는 종신전적 66전 54승 7무 5패 20KO승을 남기게 됐습니다.

염동균의 작은아버지는 당시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고향 옥천에서 명망있는 지역유지로 활동하신 분이 계셨는데 염동균이 선수생활을 정리하던 무렵 이 분이 옥천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고, 염동균은 당시 8,000만 원을 호가하던 방배동 아파트를 처분하여 후원했습니다. 하지만 작은아버지는 아쉽게 떨어졌고, 그 선거에서 당선된 국회의원이 바로 그 유명한 육영수 여사의 친오빠인 육인수 씨였습니다(박근혜 대통령의 큰외삼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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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전 천안에서 염동균, 문성길, 필자(왼쪽부터).


여담이지만 염동균이 세계챔피언에 등극했을 때 인터뷰에서 한국야쿠르트의 윤쾌병 회장에 대해 고마움을 피력했던 멘트를 올드팬들은 기억하실 겁니다(감격과 흐느낌이 어우러진 상태에서 “윤 회장님의 후원 덕분에 정상등극 성공했습니다”는 말). 유산균에 대한 개념조차 없던 시기에 탄생한 야쿠르트는 홍보대사(?) 염동균의 맹활약으로 하루 판매량이 충남 지역에서 100만 병을 돌파할 정도로 히트상품이 됐다고 합니다. 염동균은 경기할 때마다 야쿠르트 회사로부터 200만 원씩 훈련비를 지급받았고, 매월 30만 원씩 월급을 수령했습니다. 이처럼 탄탄한 스폰서였기에, 다른 챔피언들처럼 대통령 각하 운운하는 멘트를 꺼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허버트 강과의 인연

염동균은 수도경비사령부에서 군복무를 하던 시절 당시 고참이었던 동양 페더급 챔피언 출신의 허버트 강(본명 강춘식, 48년생)의 도움을 참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1970년대 초중반 허버트 강은 해질 무렵이면 당시 충무로 A살롱으로 갔는데, 그곳에는 당대 최고의 배우인 허장강, 박노식, 그리고 희극배우인 서영춘씨 등 많은 유명인의 사교장소였습니다. 허버트 강이 A살롱으로 한 번 다녀오면 많은 용돈을 얻어왔고, 타지에서 온 염동균에게 많이 베풀었던 모양입니다. 당시 주변에서는 허버트 강을 ‘충무로의 밤안개’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죠. 허버트 강의 부친은 한국 최초의 동양챔피언(미들급)인 강세철 씨였고, 이 부친도 인기 여배우 도금봉 씨와 염문설로 유명했습니다.

염동균은 허버트 강에 대한 보은으로 동양 타이틀 5차 방어전에서 받은 파이트머니 200만 원을 허버트 강에게 건넸다고 합니다. ‘형님 집 한 채라도 장만하시라’고. 또한 염동균은 2011년도 백인철이 간암으로 투병생활할 때 100만 원을 흔쾌히 낸, 의리 있는 복싱인입니다. 염동균은 은퇴 후 죽마고우인 민영기 씨와 의동생인 채승병과 함께 일송 프로모션을 차려 본격적인 프로모터로 활동하게 됩니다. 민영기 씨는 충남지역에서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한 교육자 집안의 자제분이었지만 친구인 염동균을 위해 모든 것을 접고 복싱사업에 뛰어든 파트너이자 친구입니다.

인생 2막은 ‘흥행의 마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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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프로모션 3인방. 왼쪽부터 채승병 전무, 염동균 챔피언, 민영기 사장.


염동균은 유명우 백인철 박종팔 문성길 등 많은 세계타이틀매치을 개최하는 ‘흥행의 마술사’로 변신했고, 남자 프로복싱이 침체기에 빠지자 1998년 여자 경기 프로모터로 방향을 전환해 극동 서부 프로모션을 설립했습니다. 첫 경기가 홀트 아동복지회를 통해 미국으로 입양된 스토리를 가진 킴 메서의 세계타이틀매치였죠. 많은 화제를 모은 이 경기를 스타트로 2006년에는 IFBA 스트로급 챔피언 박지현을 탄생시켰죠. 그는 지금까지 14차 방어의 대업을 이룩해왔습니다. IFBA 슈퍼페더급과 페더급을 모두 석권한 우지혜도 염동균 사장의 작품입니다.

염동균은 얼마전 해남에서 벌어진 우지혜의 세계타이틀 경기 때 도움을 준 지역 유지들에게 많은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해남은 염동균 사장이 운영하고 있는 극동 서부 프로모션 전무인 채승병 씨의 고향인데, 채승병 씨는 시라소니 이후 최고의 협객이었던 C모 회장의 최측근으로 한때는 그 세계에서 명망있는 분이었지만 염동균과 의형제를 맺으면서 지난 과거를 청산하고 복싱일을 돕고 있습니다. 과거 대원체육관에서 운동한 복서 출신기기도 합니다. 채 씨는 현재 일레븐건설이 시행하는 용인 남사개발(통삼리, 봉명리, 봉무리 등 약 150만 평의 남사 신도시 개발 회사) 이사로 근무 중인데, 이 사업이 성공리에 끝나면 염동균 사장과 함께 우수선수 후원회를 만들어 지속적으로 투자할 생각이라고 합니다. 고희를 눈 앞에 두고도 식지 않는 열정으로 복싱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염동균 사장의 앞길에 행운이 함께 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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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채승병 전무, 해남 국회의원 김영록 씨,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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