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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인평 후기] “이제는 꽃중년 임춘애입니다. 형님!” - 육상 임춘애 편
‘응답하라 1988(응팔)’에도 나왔다. 88 서울올림픽 개회식 중계방송에서 “(성화를)손기정 옹이 들고 들어와 임춘애가 이어받았다”라는 멘트. 워낙 응팔의 인기가 높았던 까닭에 뜬금없이 손기정-임춘애의 이름이 기사화될 정도로 새삼 화제를 모았다. 그렇다. 어른이었던, 아이였던 그 시절을 살았다면 임춘애 이름 석 자를 모를 순 없다.

레전드급 스포츠스타가 출연해 화제가 되고 있는 지식라디오의 ‘김용민 최익성의 스포츠인물평전’에 임춘애가 출연했다. 86 서울 아시안게임 육상 3관왕(이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다)이 웅변하는 그의 선수생활은 짧지만 강렬했다. 88 서울올림픽의 마지막 성화주자가 될 정도로 가난을 딛고 성공한 운동선수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1990년 만 21살의 나이에 은퇴한 후 그는 너무도 오랫동안 잊혀졌다. 이 정도 이력이면 육상계에서 뭐라도 하나 해야할 듯싶었지만 ‘은둔’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운동세계를 떠났다. 대신 보험설계사, 수입차딜러, 칼국수집 운영 등 먹고 사는 이야기로 잊어버릴 만하면 한 번씩 언론에 등장했다. 물론 영화 <넘버 3>에서 송강호의 역대급 대사로 크게 화제가 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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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팬입니다.' 김용민 지식라디오 대표와 포즈를 취한 임춘애 씨(오른쪽).


임춘애는 나꼼수 팬이었다. 당연히 해적방송 같은 팟캐스트 및 지식라디오에는 출연할 생각이 없었지만 진행자가 나꼼수의 목사아들돼지였던 김용민 피디라는 얘기에 모처럼 콧바람을 쐬기로 했단다. ‘김용민 팬’은 한국스포츠의 레전드들인 게스트 중 처음이었다. 물론 김용민 피디도 임춘애를 만나자마자 ‘누님’으로 부를 정도로 팬의 한 사람. 그래서일까, 팬과 팬이 만났으니 녹음은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생각지도 않은 임춘애의 개그감이 툭툭 튀어나오며 말이다.

“영화(넘버 3)는 극장에서 친구와 봤지요. 갑자기 내 이름이 나와 참 당황했어요. 어두워서 그렇지, 그렇지 않았다면 빨개진 얼굴 때문에 혼 좀 났을 거예요. 솔직히 전 이름이 마음에 안 들어요. 제가 이란성쌍둥이인데 부모님이 오빠는 임표라고 멋진 이름을 지은 반면, 저는 아무렇게나 춘애라고 지었어요. 이게 참 불만이었죠. 그런데 보세요. 현정화는 이름 얼마나 예뻐요? 하필이면 저와 동갑내기 스포츠스타인 현정화를 착각하는 대사로 큰 웃음을 만들었으니 이름 콤플렉스가 있는 저는 더 속상했죠.”
정말 본인만 느끼는 감정일 터. ‘임춘애, 현정화 이름에서 콤플렉스 느껴’라는 기사 제목으로 손색이 없는 고백이었다.

임춘애는 자신을 키운 김번일 코치의 스파르타식 훈련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놨다. 맞는 게 무서워서 열심히 뛸 수 밖에 없었다고. 코치가 연습 때 기록이 좋지 않으면 오토바이로 뒤에서 밀었고, 맞다가 고막이 터졌고, 한 번 도망갔다가 혼쭐이 났다는 등 말이다. 심지어 독실한 개신교신자인 코치 때문에 신앙은 없었지만 ‘간증’을 다니기도 했단다.

가슴 시린 얘기도 많았다. 국가대표 선발전을 치르지 않고 아시안게임 대표로 발탁되는 바람에 육상대표팀 내에서 왕따를 당했고, 심지어 남자로 의심돼 3번이나 성별검사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큰 시련은 88 서울 올림픽 때 아시안게임에 준하는 기록을 냈지만 메달을 따지 못하고, 또 이후 어린 시절 가혹한 훈련 탓에 고관절 부상으로 은퇴를 한 대목에서 나왔다. 어린 나이에 ‘배에 기름이 끼어서 못 뛴다’는 혹독한 비판을 받아 무척 괴로웠다고 한다. 개그프로그램에서 자신을 희화화한 개그맨의 이름(C모씨)을 지금도 정확히 기억할 정도니 당시의 심적 고통이 짐작이 갔다. 이렇게 밝은 성격의 소유자가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으니 어쩌면 ‘은둔’은 성격 탓이 아니라 사회가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이밖에 임춘애는 성화봉송의 소감에 대해서는 이러쿵저러쿵 의미를 부여하는 대신 “무거워서 힘들었다”는 답을 내놓았고, 자신이 거친 많은 직업에 대해서도 하나씩 그 배경과 과정을 설명했다. 물론 역대급 오보로 이미 판명이 난 ‘라면소녀’ 뒷얘기도 풀어놓았다.

“사실과 다르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오해하고 있는 라면소녀도 처음엔 아주 힘들었어요. 큰 딸이 대학생인데 아이가 어렸을 때 라면도 모르는 애한테 엄마라면 얘기를 묻고, 심지어 초등학교 때는 ‘임춘애 딸 교무실로 오세요’라고 방송까지 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괜찮아요. 라면이든, 스파르타 훈련이든 다 좋게 이해할 나이가 됐거든요. 능력이 될지 모르겠지만 기회가 닿으면 육상발전을 위해 일을 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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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3관왕을 달성했을 때의 임춘애.


기대 이상으로 즐거운 만남이었는데, 한 가지 확실한 생각이 하나 든다. 그런 시절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큰 일을 해낸 17세 소녀에 대해 한국사회는 지나치리 만큼 감동했고, 반대급부로 몰아낼 때는 아주 잔인한 방식을 택했다는 점이다. 꽃중년의 임춘애가 쿨하게 우리사회를 이해하는 만큼, 우리도 과거에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짚고 넘어가야 한다.

지식라디오를 통해 이미 방송된 스포츠인물평전-임춘애 편은 팟빵을 통해 다시 들을 수 있다. [헤럴드스포츠=유병철 편집장 einer6623@unicon.co.kr]

*김용민 최익성의 스포츠인물평전 해당 회차 다시듣기 ▶http://www.podbbang.com/ch/10698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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