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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섭의 링사이드산책] 아마복싱 사상 최고의 천적 3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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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월드컵 및 LA 올림픽 라이트급 메달리스트인 전칠성.


동물 세계를 보면 흔히 기생관계, 공생관계, 천적관계 3가지 분류로 나누어지는데, 천적의 사전적 의미는 먹이사슬 관계에서 포식자를 뜻합니다. 스포츠계에는 특정 팀(혹은 선수)에 유난히 강한 팀이 있는것 같습니다. 프로야구를 봐도 천적관계로 재미를 보거나, 낭패를 보는 사례들이 적지 않습니다. 프로야구가 태동한 지 35년이 흘러 최고의 강타자로 강열한 이미지를 심어주었던 장종훈 이승엽 이대호도 천적의 울타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장종훈은 1989년도부터 1995년 사이에 최절정기를 이루었을 때 국보급 투수 선동열과 62차례 맞대결을 펼쳐 불과 8안타(1타점)에 그쳤습니다. 타율은 고작 1할 2푼 9리. 이승엽의 천적은 한화 구대성이었습니다. 51타수 6안타. 그나마 홈런 하나 건진 것이 위안거리였고, 타율은 1할 1푼 7리였죠. 2010년 타격 부분 7관왕의 대업을 이룬 이대호의 저승사자는 SK 투수였던 정대현 이었습니다. 2004년부터 2010년까지 40타수 2안타 2타점의 빈타에 시달렸고, 삼진은 6차례나 당했습니다. 26타수 연속 무안타 기록도 나왔고, 타율은 고작 5푼이었습니다. 김성근 감독은 정대현의 공의 궤적과 이대호의 히팅 포인트가 서로 상극이었다고 분석했습니다.

김기택에 덜미를 잡힌, 올림픽 메달리스트 전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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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남 심판과 김기택 감독(오른쪽).


1980년대 초중반 한국 아마복싱의 황금기에 3명의 라이트급 복서가 있었습니다. 그 중 전칠성은 1961년 전남 신안 태생으로 1981년 전국신인대회 금메달과 그해 전국체전 은메달을 획득하며 문성길과 함께 목포대로 진학한 전도유망한 복서였습니다. 이듬해 그는 제63회 전국체전 라이트웰터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했고, 1983년 로마 월드컵대회에 당당히 국가대표(라이트급)로 출전하여 준결승에서 폴란드의 츠프렌스키를 꺾고, 결승에서 그 유명한 쿠바의 고이리와 다운을 주고받는 치열한 접전(은메달)을 펼친 복서였습니다. 그 대회를 코치로 참관한 목포대의 최진태 감독은 전칠성의 감투정신이 상상을 초월했다고 회고했습니다.

전칠성은 1984년 LA올림픽에도 출전해 8강에서 세계선수권 은메달리스트인 칸탄치오(필리핀)에게 3라운드 극적인 KO승을 거두며 동메달을 확보했고, 결승에서 미국의 사우스포 복서인 퍼넬 휘테커와 초접전을 벌였습니다. 아쉽게 패했지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후에 휘테커는 프로로 돌아 오스카 델라 호야(미국)와 차베스(멕시코)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4체급을 석권한 전설의 복서가 됐죠.

이 전칠성의 최대 천적이 바로 현재 수원시청 복싱 감독으로 있는 왼손잡이 김기택(1964년생, 안성고-수원대)이었습니다. 1984년 LA올림픽 최종선발전 준결승에서 김기택은 3살이나 위인 23살의 전칠성을 자유자재로 유린한 끝에 무난한 판정승을 거뒀습니다(그런데도 전칠성이 LA올림픽에 나간 것은 지난 1월 30일 칼럼 ‘LA올림픽 선발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편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 이듬해인 1985년 서울 월드컵 파견 선발전에서도 첫 대결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저돌적으로 들어오는 전칠성의 안면에 기가 막힌 카운터를 명중시키면서 KO승을 따냈습니다. 전칠성 입장에서는 올림픽 메달리스트로써 체면을 구긴 경기가 됐죠. 3번째 대결은 1986년도 아시안게임 선발전이었습니다. 한 체급 올린 라이트웰터급이었는데요, 세 번째도 전칠성은 김기택의 함포 사격에 실신 KO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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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대 재학 시절의 김기택 선수.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전칠성은 세계적인 사우스포 복서인 퍼넬 휘테커나 김동길을 상대로 박진감 있게 경기를 펼친 것으로 유명했는데 김기택에게는 마치 솔개를 만난 병아리처럼 전전긍긍하기 바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글자 그대로 천적이라고 할 수 있죠.

이 패배 후 전칠성은 곧바로 짐을 싸서 태릉선수촌을 나와 그해 3월 심영자 회장이 활동했던 88프로모션 소속으로 프로에 데뷔합니다. 그리고 1992년 6월 조이 가마체(미국)와 WBA 라이트급 타이틀을 벌여 8라운드 TKO패를 당하고, 20전 18승(11KO) 2패의 전적을 뒤로 하고 은퇴를 선언합니다. 몇 년 전까지 스포츠용품 사업을 했는데, 최근에는 보험 설계사로 분주하게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전칠성의 천적 김기택은 중학교 2,3 학년 때 학생선수권대회에서 후에 고아 복서로 유명해진, 세계적인 복서 권철(1961년생, 프로전적 27전 26승 19KO 1무)과 치열한 접전 끝에 1승 1패를 거두면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981년 안성고 2학년 때 월드컵과 킹스컵 그리고 아시아선수권 선발전을 모조리 우승하면서 3관왕에 대업을 이룹니다. 제7회 킹스컵 본선에 출전한 만 17세의 김기택은 은메달을 획득하면서 국제적인 복서로 한층 성장합니다.

김기택은 1985년 서울 월드컵대회 결승에서 동독의 메너트에게 1라운드 RSC승을 거두고 세계 정상급 복서의 반열에 올라섰고, 기세를 몰아 1986년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최고의 절정기를 구가합니다. 당시 한국 아마복싱 국가대표팀의 보리스 키트만 코치는 김기택은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와 있는 최고의 복서라고 칭찬했습니다.

김기택은 1987년 유고 월드컵대회에서도 동메달을 획득하며 입지를 다졌지만, 88 서울 올림픽 선발전에서 아쉬운 패배를 당합니다. 원광대의 전진철을 상대 우세한 경기를 펼쳤는데 승리의 여신은 김기택을 외면했습니다. 외국인 코치가 세계적인 선수로 극찬했던 복서가 국내 선발전에서 패한 것입니다.

고희룡 앞에서는 작아지는 김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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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올림픽 최종 선발전에서 극강의 김동길과 혈투를 펼치는 고희룡(오른쪽).


이러한 화려한 경력의 김기택에게도 천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당시 웅비 소속이었던 고희룡(1961년생 제주도)이었습니다. 이 두 선수도 3차례 맞대결을 펼쳤지만 모두 고희룡이 승리했습니다. 고희룡은 김기택의 카운터펀치를 원천봉쇄하며 무기력하게 만들었고, 유효타를 많이 적중시켰습니다. 후에 사석에서 필자가 고희룡에게 사우스포를 잡는 비법을 물은 적이 있습니다. “라이트 스트레이트 페인팅으로 유인한 후에 들어오는 상대에게 레프트 훅을 때리는데 훅의 종류를 예각 직각 둔각 3가지 형태로 분류했다. 직각과 둔각 사이의 포인트를 두고 왼손을 마치 현관문 문고리 비틀듯이 타격함으로써 히팅 포인트를 맞췄다.” 정말이지 고개가 끄덕여지는 치밀한 전법이었습니다. 고희룡은 1984년 LA 올림픽 최종선발전 결승에서도 당대 최고의 복서였고, 세계선수권 대회 은메달리스트인 김동길(61년생 담양, 한국체대)을 상대로 초접전을 벌일 정도로 그야말로 ‘사우스포 킬러’였습니다.

현재 제주복싱협회 부회장과 대한복싱협회 기술위원을 겸하고 있고, 2014년 새롭게 출범한 국제복싱협회(AIBA) 선수위원으로 위촉된 고희룡은 1979년 동래공고 3학년 때 늦게 복싱을 입문한 대기만성형의 복서였습니다. 운동한 지 3개월만에 세계 주니어선수권 선발전에 출전, 준결승에서 후에 세계 프로복싱 챔피언에 등극하는 오민근(천호상전)에게 패했지만 값진 동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그해 11월 전국우승권대회에서 페더급을 제패하면서 부산 동원전문대학으로 진학했습니다.

고희룡은 1981년 제11회 대통령배 본선 페더급 결승에서 전남대표인 진행범과 치열한 접전 끝에 2-3으로 고배를 마셨지만 본격적으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982년 김명복박사배에서 4체급을 석권한 한체대(김재홍, 박권순, 이윤희, 이창근)와 3체급 우승의 동아대(김용호, 정대성, 박노일) 등 복싱명문 학교 틈바구니에서 라이트급 정상에 오르면서 대학 최고의 복서로 올라섭니다. 이어 그해 벌어진 뉴델리 아시안게임 최종 선발전에서 당시 국가대표였던 이현주(목포대)를 꺾고, 신문 1면을 장식하면서 국가대표급으로 실력이 일취월장합니다.

고희룡은 1983년 국군체육부대에 입대하면서 복서로 화려하게 재탄생합니다. 1983년 로마 월드컵 선발전 우승을 필두로, 1984년 LA올림픽 1차 선발전에서도 정상에 올라 국가대표가 됐죠. 그해 킹스컵(태국), 핀란드 탬머 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해 탬머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기도 했습니다. 1985년 인도네시아 대통령배에 국가대표로 출전했던 고희룡은 그해 전국체전을 끝으로 짧지만 강렬했던 복싱 이력서에 마침표를 찍습니다.

전칠성에게 꼬리내린 고희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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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제주복싱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고희룡 씨.


고희룡의 천적은 전칠성이었습니다. 고희룡은 흔히 말하는 가슴을 오픈시키는 업라이트 스타일이었고, 전칠성은 웅크린 자세의 크라우칭 스타일이었습니다. 전칠성의 별명은 ‘오토바이’였습니다. 1라운드부터 성능좋은 탱크처럼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인파이터였죠. 고희룡은 2라운드 중반까지는 비교적 우세하게 경기를 주도했지만 후반부터는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전칠성의 강한 프레스(press)에 고희룡은 재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주도권을 내준 것입니다.

언젠가 고희룡이 필자에게 웃으면서 한 말이 생각납니다. “2라운드가 끝나면 일부러 슈즈끈을 느슨하게 묶고 3라운드를 맞이하곤 했지.” 경기 중에 슈즈끈이 풀어지면 휴식을 취하면서 전열을 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희룡도 전칠성에게 3차례 정도 경기를 치렀지만 단 한 차례도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전칠성-김기택-고희룡 이 3명의 복서는 서로 물고 물리는, 생태계의 먹이사슬 관계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서로의 상생이 너무나 명징해서 한국 아마복싱 황금기의 대표적인 천적관계 3인방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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