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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섭의 링사이드산책] ‘복싱판 미다스의 손’ - 조석인 대한복싱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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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석인 대한복싱협회 부회장.


현재 한국 프로복싱은 사분오열되어 총체적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정선용 KBF 사무총장이 얼마 전 폭탄선언을 했습니다. 연맹이 하나로 통일(?) 된다면 총장직을 내던지고 백의종군하겠다고 말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백범 김구 선생이 상해 임시정부의 중책을 맡고 있던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나 내뱉은 말이 생각납니다. “통일을 위해서라면 이 한 몸 기꺼이 임시 정부의 문지기라도 자처하겠다”고 말입니다.

백범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청년들에게 '쟁족(爭足)'하라고 강조했습니다. 보통은 사람들이 여럿 모이게 되면 서로 '머리' 즉 '우두머리'가 되려고 '쟁두(爭頭)'를 하지만, 백범은 '머리'가 되려고 싸우지 말고 '발'이 되려고 애를 쓰라고 하였습니다. 집이 튼튼해지려면 기둥뿌리보다는 주춧돌이 많아야 균형 잡힌 형태의 집이 탄생하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서로 우두머리가 되려고 다투어 위로 올라가려다 보면 머리가 무거워져서 쉽게 쓰러지지만, 발이 되려고 서로 아래로 내려가면 발이 많아 죽어서도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백범의 휘호 중에 '불환과이환불균(不患寡而患不均)'이라는 게 있습니다. 나라를 책임진 사람이나, 가정의 가장은 적게 가진 것을 걱정하기에 앞서, 국민과 가족에게 고루 나눠지지 못함을 먼저 걱정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함께 가진 것을 나누지 못하는 마인드를 가진 사람은 수장으로써의 기본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팔순을 넘긴 아마복싱의 전설

오늘은 한국 아마 복싱사에 살아있는 전설이자 팔순인 현재까지도 대한복싱협회(전 대한아마복싱연맹) 부회장을 맡고 있는 조석인(36년생, 익산) 씨를 소개할까 합니다. 이 ‘분’(워낙 어른이신 까닭에 존칭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호칭은 회장으로 하겠습니다)은 1960년 9월 고향인 익산 땅에 복싱체육관을 창단한 이래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한국 아마 복싱의 기승전결, 흥망성쇠를 현장에서 목도한 몇 안 되는 복싱 원로 중의 한 분입니다. 88 서울올림픽 때에는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결승전 심판을 보기도 하셨죠.

조석인의 손을 거쳐간 후학들로는 이거성(지난 편에 소개해드렸죠?)을 비롯하여 전 동양 라이트급 챔피언이었던 조영철, 박남철(현 KBF 심판부장), 강월성(남원 시청 감독), 김운석(전국체전 3연패, 현 문성길 명일 체육관 관장), 고요다, 김장섭, 최우진, 소배원, 신준섭, 전진철, 박덕규, 송학성, 황인도 등이 있습니다. 수많은 국가대표급 선수들을 양성한 ‘복싱계의 살아 있는 전설’ 조석인의 회고담을 <헤럴드스포츠>를 통해서 처음으로 실을 수 있어서 솔직히 벅찬 감회가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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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길과 조회장의 제자들(왼쪽부터 강월성, 최우진, 신종관).


조석인 회장은 1972년 국가대표 코치를 시작으로 이후 굵직굵직한 대회에서 국제심판으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대한아마복싱연맹 전무와 부회장은 물론 한국대학복싱연맹 회장과 전라북도 체육회 사무국장 등 중요한 요직를 두루 거쳤습니다. 물론 현재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고요. 어쨌든 한국 복싱을 쥐락펴락했던 역사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기 시작 후 심판을 바꾸다

조식인 회장은 이거성 ‘선수’가 1968년 멕시코 올림픽 최종선발전 결승에서 서상영에게 팽팽한 접전 끝에 패하자, 와신상담 끝에 4년 후인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제대로 설욕에 성공했습니다. 당시 남성고 2학년이던 유종만(현 한국체대 교수)이 플라이급에서 선발된 이야기인데 얼마 전 이 컬럼을 통해 그 결과를 공개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비화가 하나 숨어 있었습니다. 당시 경기가 시작되자, 김택수 대한체육회장이 단상에 자리하고, 심판 5명이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한 조 회장은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가운데 잠시 타임을 요청했습니다. 유종만의 상대가 서울 출신의 김영식(50년생 수경사, 후에 OPBF 밴텀급 챔피언)이었는데 서울심판 3명이 포진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 회장은 지금까지도 그때 심판 명단을 생생히 기억하고 계셨습니다(팔순이신데도 말입니다). 당시 조석인 관장은 H모 씨 등 서울심판 두 분을 지방심판으로 과감하게 교체를 했고, 경기가 속개됐습니다. 이 한 경기에 뮌헨올림픽 출전권이 걸려 있었는데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기지를 발휘한 것입니다. 경기 결과는 3대2로 유종만의 아슬아슬한 판정승. 결국 교체돼 들어간 심판 2먕이 유종만의 손을 들어준 것입니다. 그 중 한 분은 이미 고인이 되신 전재완(전 청주사대 교수) 씨였습니다.

이 일은 43년 전에 일어난 것으로 이번에 처음 공개된 것입니다(개인적으로 이런 역사발굴에 참 보람을 느낍니다). 참고로 고등학교 2학년으로 태극마크를 달게 된 유종만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뮌헨올림픽에서 8강까지 올라가 유럽챔피언인 폴란드의 브리젠스키에게 아깝게 2대3으로 판정패했지만, 좋은 경기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미운오리새끼에서 백조가 된 신준섭

조석인 회장은 복싱역사에 숨어 있는 비화 한 가지를 더 공개했습니다. 1984년 LA 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을 획득한 신준섭(미들급)에 대한 이야기죠. 신준섭(63년생, 현재 미국 거주)은 목포대의 장성호(62년생, 현 목포여상 교사)에게 두 차례나 다운을 당하는 고전 끝에 극적으로 판정승을 거두고 LA 올림픽 출전권을 땄습니다(조석인 회장과 쌍벽을 이루던, 지금은 고인이 되신 전남복싱의 대부 이재인 심판장은 이때 마음이 상해 조 회장과는 한동안 마주쳐도 서로 외면하고 말을 하지 않을 정도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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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이래 최초의 올림픽 복싱 금메달리스트 신준섭.


그런데 당시 J일보 기자이던 N모 씨가 신문 1면 박스란에 신준섭의 형편없는 기량을 질타하는 기사를 실었고, 여기에 올림픽 출전 전에 핀란드에서 치렀던 템머 대회에서 준결승에서 소련 선수에게 KO를 당한 전력까지 아프게 지적했습니다. 이에 태릉선수촌에서 이 기사를 본 신준섭은 도저히 의욕이 나지 않아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하겠다’고 결심하고는 급기야 이리체육관에 내려와 스승인 조석인 관장에게 무릎을 꿇고 하소연했다고 합니다.

이때 조석인 관장은 신준섭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면서 따뜻하게 격려했고 너는 누가 뭐래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다고 강한 암시를 주었다고 합니다. 스승의 진심어린 따뜻한 충고에 마음을 추스리고 상경한 신준섭은 태릉에서 심기일전 훈련에 몰두하였고 가끔씩 스승에게 감사의 엽서도 보냈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 엽서를 스승인 조석인 회장은 여러 장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결국 신준섭은 올림픽 금메달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건국 이래 최초의 복싱 금메달이 탄생하기까지 이렇듯 숨어있는 우여곡절이 있는 줄 저도 전혀 몰랐습니다. 참으로 가슴 뭉클해지는 뒷이야기였습니다.

수비(방어)의 미학

필자도 조석인 회장 밑에서 3년 동안 전국체전을 위한 합숙훈련을 받았는데, 정말이지 권투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이 분은 특히 ‘복싱의 기본은 스탭’이라며 스탭만 따로 시간을 내서 테스트를 할 정도로 발놀림을 복싱의 최우선으로 삼았습니다. 이 분의 지론은 <복싱은 공격을 잘하는 선수는 이길 수 있지만, 수비를 잘하는 선수는 우승할 수 있다>였습니다. 명장다운 기술이론이고, 복싱철학입니다. 최근 인터뷰에서 오랜만에 이 말을 듣게 되자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같은 큰 경기에서 조그만 실책 하나가 경기의 승패를 좌우하는 모습이 절로 오버랩 됐습니다. 참고로 조석인 회장은 허영모-문성길의 두 번째 라이벌전의 주심이기도 했습니다.

필자에게 가슴에 묻어두었던 비화를 꺼낸 조석인 회장은 군산 기계공고에서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던 김장섭(68년생 군산)이라는 선수를 원광대학으로 스카우트해 국가대표로 만든 바 있습니다. 김장섭은 1993년 동아시아 대회에서 당당히 금메달(라이트미들급)을 땄죠. 참고로 김장섭은 현 KPBF 심판장이신 김병기 심판의 조카입니다.

그리고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 국내 선발전 밴텀급 결승에서 황경섭(청주사대)에게 패한 박덕규(72년생 예천, 경북체고)를 이듬해 원광대학교에 스카우트해 호주에서 벌어진 세계선수권에서 파란의 주인공으로 조련했습니다. 박덕규는 세계선수권 준결승(페더급)에서 그 유명한 쿠바의 아놀드 메사를 16대15 판정으로 꺾고 결승에 올라, 불가리아의 키르코로프에게 14대14 동점을 기록했습니다. 아깝게 종합 57대58로 패했지만 정말 값진 은메달이었습니다. 박덕규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페더급 8강(이 올림픽에 박덕규, 전진철, 고요다 등 원광대 출신이 3명이나 출전했습니다)에서, 그 대회의 우승자이자 4년 전 88올림픽에서 김광선과 플라이급 결승에서 자웅을 겨뤘던 독일의 안드레아스 테브스에게 아깝게 판정패하기도 했습니다(최종 5위). 원광대 재학 시절 신은철(대전대), 황경섭(청주사대), 김명종(경희대), 조인주(동국대), 신수영(한국체대) 등 당시 국내에서 한가닥하는 스타급 복서들을 모두 꺾었던 특급 파이터 박덕규는 후에 필자에게 “조석인 회장의 지도 철학에 존경심을 표한다. 아마복싱의 살아있는 역사”라고 말했습니다. 박덕규는 현재 영주에 있는 SK 특수 반도체 회사에 건실한 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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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세계복싱선수권 은메달리스트 박덕규.



필자와 같이 운동했던 이리 남원농고의 장종규(64년생 원광대, 전주 챔피언체육관 관장)라는 복서도 생각납니다. 이 친구는 아마추어 시절 필자와 두 차례 격돌을 했고, 고등학교 3년 동안 전국체전에 한 번도 나가지 못했습니다. 달랑 전국대회 3등 상장 하나로 턱걸이 하다시피 원광대에 입학했는데 입학 이듬해 대뜸 제66회 전국체육대회 플라이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이어 조인주(동국대), 오영호(상무, 87년 서울컵 금메달), 김용상(경희대)를 꺽으며 국가대표가 됐고, 인도네시아 대통령배와 재팬컵에 출전해 모두 은메달을 획득할 정도로 국제대회 성적도 좋았습니다.

장종규와 남원농고 동기인 황인도라는 복서도 원광대에 입학한 후 LA올림픽에 출전했던 국가대표의 간판 안달호(63년생 일우공영)를 꺽고 곧바로 85년 서울 월드컵에 국가대표로 출전했습니다. 충격을 받은 대표팀 터줏대감 안달호는 황인도에게 패하고 이듬해 곧바로 프로로 방향 전환하였습니다.

아마복싱 미다스의 손

이처럼 조석인 회장은 한 마디로 미다스(Midas)처럼 손을 대는 선수는 모두 엄청난 기량발전을 이뤘습니다. 필자는 이 칼럼을 가능한 압축해서 쓰려고 노력하는데 이번 편은 아무리 애를 써도 양이 잘 줄지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짧게 쓰기에는 내용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조석인은 한국 아마복싱에서 지울 수 없는 이름인 것입니다.

1953년 에드먼드 힐러리 경이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을 때 사람들이 그에게 비결을 묻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간단하다. 한 발 한 발 걸어서 올라갔다. 에베레스트는 체력이 강한 사람이 오르는 게 아니라 오르고 싶은 사람만이 오른다. 정상에 연연하지 말라. 처음 내딛는 발걸음이 정상 정복의 시작이다." 조석인 회장과 그의 수많은 스타제자들에게 참 잘 어울리는 말인 듯싶습니다.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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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석인 부회장은 아직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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