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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성훈의 언플러그드] 얄팍한 민족주의 부추기기는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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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도쿄에서 열린 2015 프리미어12 한국 대 일본의 준결승전에 승리 후 한국 선수단의 세리모니.


지난 19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2015 프리미어12 한국 대 일본의 준결승전을 TV로 보면서 필자는 두 번 놀랐다. 한국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투지를 보이면서 9회에 대역전극(4-3)을 연출해 놀랐고, 경기가 끝난 뒤 한국 선수들이 승리 세리모니를 하는 순간 배경음악으로 가수 마야의 ‘진달래꽃’이 흘러나온 것에 또 놀랐다.

그런데, 두 놀람의 이유는 대조적이었다. 전자는 한국 선수들의 저력에 환호하는 희열의 놀라움이었고, 후자는 얄팍한 민족주의 부추기에 뒷맛이 개운치 않은 씁쓸함의 놀라움이었다. 대역전승에 대한 기쁨의 놀람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놀람이다. 한국이 이겼으니 말이다. 그러나, 왜 하필 배경음악이 ‘진달래꽃’이어야 했을까?

‘진달래꽃’이 흘러나온 것을 두고 대부분의 언론과 누리꾼은 “통쾌하다”, “센스있다”는 등의 반응을 보였다. 역전의 기쁨이 배가 되었다는 것이다. ‘가시는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라는 가사를 들으며 일본 대표팀을 밟았다는 느낌을 받은 것 같다. 이 부분에는 필자도 충분히 공감한다.

그러나 그런 느낌을 준 주체가 TV 방송국이었다는 점은 유감이다. 시청자들로 하여금 경기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을 밟았다(사실 밟았다라는 표현도 적절하지는 않다)는 느낌을 받게 하고, 배경음악을 통해 민족주의를 의도적으로 부추겼다는 오해를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해당 방송국의 ‘민족주의 부추기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경기 후 방송국 홈페이지에 너무나도 섬뜩한 이미지가 올라와 있었다. 영화 ‘일본침몰’을 패러디한 것으로 보이는 이 이미지에는 ‘일본침몰’이라는 제목하에 도쿄돔이 불덩이 같은 야구공에 침몰하고 있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연출되어 있었다.

TV 방송국을 비롯한 언론사들의 부적절한 민족주의 부추기기는 사실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운동 경기를 마치 ‘전쟁’에 비유한다. ‘대첩’ ‘격침’ ‘태극전사’ ‘전범’ ‘용병’ ‘전차군단’ ‘초토화’ 등의 살벌한 용어들을 나열한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야구 준결승전에서 한 해설자는 이승엽이 홈런을 치자 “독도를 넘겼다”, “대마도까지 날아갔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다분히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발언들이었다.

이렇듯 언론들이 민족주의를 부추기자 일부 팬들도 이에 동참하는 현상까지 일어났다. 2011년 일본에서 대형 쓰나미와 지진이 일어나자 일부 축구 팬들이 경기장에 ‘일본의 대지진을 축하한다’는 현수막을 걸어놓는 기막힌 사건이 발생했는가 하면, 2013년 한국과 일본의 축구 경기에서는 이순신 장군과 안중근 의사의 대형 초상화가 등장했다. 또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플래카드가 걸리기도 했다.

언론과 팬들의 ‘성화’에 선수들마저 부화뇌동하는 경우도 있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한국의 한 축구선수는 일본과의 경기에서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피켓을 들고 세리모니를 하여 FIFA로부터 징계를 받았다.

한국 언론들만 민족주의를 부채질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 역시 한국과 경기를 할 때면 무척이나 민감해진다. 특히 우익 언론들의 그것은 도를 지나친다. 팬들도 우리나라와의 국가대항전에 욱일기를 내걸며 민족주의를 부추겨왔다.

민족주의가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스포츠에서의 민족주의 순기능은 분명히 존재한다. 2002년 한일월드컵은 그 좋은 예이다. 축구를 매개로 우리는 생면부지의 사람과 서로 기뻐하고 즐거워했다.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리고 한국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치면 편협한(닫힌) 민족주의라는 덧옷이 입혀져 역기능이 발생한다. 특히 서로 감정이 좋지 않은 국가들 간의 경기에서는 더욱 그렇다. 스포츠의 가치와는 전혀 다른 문제가 개입되어 양국 간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지게 된다.

2006년 WBC 대회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은 일본을 꺾은 후 마운드에 태극기를 꽂았다. 패자에 대한 모욕적 행동으로 오해를 살만 했다. 이에 일본 아나운서는 “사무라이 재팬은 이 날을 잊어서는 안 된다”라며 민족주의를 부추겼다. 이런 점에서, 한국 선수들이 이번 프리미어12 대회 한일 전에서 승리한 뒤 태극기를 마운드에 꽂지 않은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사실을 정확하고 공정하게 전달하는 것이 언론의 기본 임무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에서든 일본에서든, 자국 팀이 출전하는 경기에서 양국 언론들은 이를 망각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아예 기자, 아니운서, 해설자 모두 응원군이 되어버린다. 이제 이런 얄팍한 민족주의 부추기기로 자칫 국가 간 감정의 골을 더욱 깊게 하는 행위는 지양되어야 한다. 민족주의보다는 스포츠가 지니고 있는 가치 고양에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seanluba@hanmail.net

*필자는 미주 한국일보와 <스포츠투데이>에서 기자, 체육부장 및 연예부장을 역임했고, 현재 스포테인먼트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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