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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섭의 링사이드산책] (4) 가을, 마마 심의 얼굴이 떠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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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 배우 시절의 심영자 회장.



나이 50을 훌쩍 넘겨 중년의 남자가 되니, 시쳇말로 가을을 좀 타는 것 같습니다.
제가 올해 26년째 복싱 현장에서 뛰고 있는데 앞으로 10여 년 정도 더 지나면 자동차로 말하면 폐차가 되어 더 이상 현장에서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우울함이 듭니다. 그리고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이 적기 때문일까요? 흘러간 과거가 더욱 더 감미롭게 다가옵니다. 가을이라서 문득 제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 박인희 씨가 부르고 박인환 시인이 쓴 '얼굴'이라는 시가 새삼스레 떠오릅니다.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기를 꽂고 산들 무엇하나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몸매를 감은
한 마리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엇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밤내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르는데
가슴에 돌단을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단 한마디
(후략)


한국 프로복싱의 전성기였던 1980년대 한때 세계챔피언 6명이 동시에 탄생하는 꿈 같은 시절이 있었습니다. 당시 극동(전호연), 동아(김현치) 등과 함께 골든 트라이앵글을 구축하며 프로 복싱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여걸이 한 명 있었습니다. 바로 88프로모션의 심영자 회장입니다. 그의 라이프 스토리를 소개하려 하니 ‘얼굴’이라는 시가 떠오른 겁니다.

심영자 회장은 1943년 5월 18일 전북 군산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나 군산 풍문초등학교-중앙여중을 거쳐 대전 호수돈여고 재학시절 무용을 전공했습니다. 발레리나가 꿈이었던 깜찍한 소녀였죠. 그런데 발레리나가 되기에는 너무 예뻤고, 너무 끼가 넘쳤습니다. 여고시절 당시 시나리오 작가였던 셋째오빠 심준섭 씨(작고)와 친분이 있던 한 영화감독의 눈에 띄어 생각지도 않는 배우의 길을 걷게 됐습니다.
당시에 꽤 관심을 끌었던 ‘죽도록 사랑했노라’에서 신성일(1937년 대구 출신)의 상대역을 맡았던 것을 비롯해 ‘홍도야 우지마라’, ‘10대 부부’, ‘쌍칼’, ‘딸들의 결혼’, ‘이대왕검’ 등 17편의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KBS 소속의 탤런트로도 고수미, 지방은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는데 전양자, 사미자, 김형자, 박경자(박주아 씨의 본명) 등과 자매처럼 지냈습니다.

‘잘 나가는 배우’ 심영자는 1966년 결혼과 함께 스크린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둘째오빠(성이 다른 오빠라 이름을 밝히기 어렵습니다)의 영향으로 복싱계와 운명적인 인연을 맺습니다. 둘째오빠는 1950년대 중반부터 자유당 시절 남대문을 중심으로 한 번 물면 놓치지 않는다는 뜻의 ‘살모사’라는 닉네임으로 유명했던 주먹이었죠. 활동공간이 같았던 김성준(1953년 생)이라는 복서가 이 둘째오빠의 레이더망에 포착되어 여동생인 심영자 씨와 연결됐습니다. 이후 심 회장은 김성준이 정상에 오를 때까지 후원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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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자 회장의 첫 번째 작품인 고 김성준 선수.


김성준은 부산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부친의 사업실패로 2살 때 서울 홍재동의 허름한 판잣집으로 옮겨왔습니다. 철들기도 전인 14살에 가출하여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던 중 1년 후 서울 최대 우범지대인 남대문에서 전문 소매치기가 됐습니다. 일대에서 일명 ‘빽따기’ 솜씨는 천부적이라는 평을 들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죗값을 치르고 링에 복귀한 김성준은 심 회장님을 “누님”이라 부르며 친동생처럼 따랐습니다.

심 회장은 김성준이 극심한 체중조절에 시달릴 때 피를 뺏다가 중량을 통과한 후에 다시 수혈하는 모습을 보고 상당히 안타까웠다고 회고한 바 있습니다. 또 한 번은 세계챔피언이 된 김성준과 함께 고속도로를 주행하다가 주차위반에 걸렸는데 김성준이 “안녕하십니까? 김성준입니다”라고 말하자 경찰관이 거수경례를 하면서 그냥 통과시켜줄 정도로 당시 권투 챔피언에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고도 일화를 소개한 적도 있습니다.

극동프로모션의 후원회장을 맡은 심영자 회장은 김성준을 비롯, 김철호, 이일복, 장정구 등 많은 선수들을 적극 후원했습니다. 아예 자신의 집에 합숙소를 차려 선수들을 동생, 자식들처럼 후원한 것은 유명한 일입니다. 지금도 장정구는 심 회장의 자녀들(1남1녀)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더군요. 왜냐하면 복싱 선수들에게 열과 성을 쏟느라 자녀들에게 소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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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힐 합숙소에서 식사를 하는 선수들. 왼쪽부터 장정구, 이일복, 김철호.


1979년 말 신설된 WBC 슈퍼플라이급 챔피언 라파엘 오로노(베네수엘라)에 대한 도전자 결정권을 두고 김성준이 김철호와 한판 승부를 벌였는데, 그때 심영자 회장은 누구를 응원할지 만감이 교차했다고 합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집에서 합숙을 시키고 있는 김철호를 밀어야했지만 옛정을 생각하면 김성준에게도 정이 많이 갔기 때문입니다. 1989년 2월 3일, 김성준이 삶을 마감하기 몇 시간 전 심영자 회장에게 전화를 할 정도로 둘은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최측근이었던 전 세계랭커였던 이일복(1958년 생, 전남 신안) 씨의 회고에 따르면 김성준은 복싱으로 벌은 파이트머니로 가족들을 지극 정성으로 부양하느라 은퇴 후에는 가진 것이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잇따른 사업실패와 가정불화 그리고 챔피언 시절 화려한 생활에 젖어 있다가 암담한 현실과 오버랩 되다보니 가뜩이나 자존심이 강한 분이 이를 감내하지 못하고 남대문 조양빌딩 6층에서 뛰어내리면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유서에는 ‘보잘 것 없고, 가련하고, 못 배운 놈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오직 나는 마지막 사랑을 나의 목숨보다 사랑했다’라고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김성준은 48전 28승 13KO 14패 6무 전적으로 단 한차례의 KO패도 없었습니다. 홍수환처럼 쓰러질 때 적당히 쓰러질 줄 아는 유연성(?)만 있었다면 막판에 펀치드렁크 후유증도 적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성준은 챔피언이 될 때 온갖 찬사를 보내는 기자들에게 따끔하게 일침을 가합니다. “내가 챔피언이 되었다고 갑자기 나를 멋있는 남자로 만들지 말아 달라. 대신 나의 어두운 과거도 말하지 말라.” 참으로 굴곡진 삶의 현실이 짧은 한 줄 속에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참고로 김성준은 한 살 위 친형(김봉준 1952년생)이 있었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이 분은 경기고(한화 김승연 회장과 동기)-서울대를 나온 수재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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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국제 무대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심영자 회장.


김철호 얘기가 나온 김에 양일(1961년 생, 천호상전 졸)이라는 선수도 함께 소개하고 싶네요. 심영자 회장은 1978년 역시 남대문에서 둘째오빠의 휘하에서 행동대장으로 활동했던 김진길(1940년 7월 9일 경남 합천) 관장의 천거로 양일이라는 선수를 후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말동무로 픽업된 게 천호상전 1년 후배인 김철호(1961년 3월 3일 경기도 화성)였습니다. 양일은 1978년 서울 신인, 전국신인, 그리고 그해 MBC 신인왕전 3개의 대회에서 페더급을 제패했는데, 3개 대회에서 모두 최우수 복서에 선정될 정도로 보석 같은 존재였습니다. 기자들 사이에서 ‘복싱신동’으로 불렸고, 심지어 ‘복싱천재’라는 최대의 찬사까지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후 노력하지 않는 신동은 세인들에게 신기한 동물로 전락된다는 평범한 교훈을 남기며 쓸쓸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반면 김철호는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처럼 우직함과 성실함으로 세계 정상에 등극함으로써 양일과는 대조적인 삶의 궤적을 보여주었습니다.

김철호가 야인으로 전락한 1983년 어느 날 본인이 체육관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자 심영자 회장은 88체육관을 개장합니다. 그해 10월 20일 필자를 비롯하여 황동용, 김의진, 김강원 등 당신의 고향팀 소속 4명과 남편의 고향인 부산에서 박용운, 박광구, 최연갑, 윤용호 등 4명 등 총 8명이 ‘동서화합팀’으로 스카우트돼 첫 항해의 돛을 달았습니다. 체육관을 만든 다음 해에는 88프로모션까지 설립했죠. 창단 첫 시합은 84년 3월 17일, 메인매치는 국가대표 박용운(1964년 생)와 필리핀의 도동 오큐람의 대전이었습니다. 이후 88프로모션의 행보는 화려함 그 자체였습니다. 이경연, WBA 밴텀급 WBC 슈퍼 플라이급 두 체급 석권의 주인공인 문성길, WBA,WBC 플라이급 양대기구 챔피언 김용강, 그리고 정비원, 김봉준, 장태일, 백종권, 최요삼 등이 줄줄이 탄생하면서 심영자 회장은 당시 프로복싱 흥행에 60퍼센트를 움직일 정도로 막강한 파워를 과시했습니다.

‘화무십일홍’이라고 이렇게 10년간 한국 프로복싱 발전을 이끌던 88프로모션은 최고의 히트상품이던 문성길이 1993년 말 10차방어에서 챔피언 벨트를 풀면서 붕괴의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앞서 1991년부터 ㅇㅇ물산을 운영하던 남편의 사업이 크게 흔들리면서 88프로모션도 도미노현상에 휩쓸렸습니다. 결국 경기도 안성에 있는 무려 5만평의 임야와 명동의 400평의 대지 그리고 40억 원을 호가하던 자택인 워커힐 아파트가 한 순간에 연기처럼 사라지는 아픔을 맛보았습니다. 가수 박인희의 ‘모닥불’이라는 노래에 나오는 가사처럼 ‘인생은 연기처럼 재를 남기고 말없이 사라지는 모닥불 같은 것’이더군요. 결국 최요삼 백종권 등 소속선수들이 세계정상에 오르며 부활을 꿈꿨지만 받쳐내기에는 힘겨움에 지쳐 88프로모션은 1994년 5월 어느날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수년 후 숭민프로모션을 설립하면서 힘찬 재기의 페달을 밟았지만 흘러간 물은 물레방아를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명동에 나가면 뭇 남성의 시선을 잡아끌었던 미모의 심영자 회장은 이후 노년의 삶이 팍팍했습니다. 남편과 사별하고,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었지요. 다행인 것은 과거 ‘마마 심’의 식구였던 복서 몇몇이 심 회장을 잊지 않고 지금도 챙기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장정구는 심 회장 남편분의 서울대 친구였던 롯데의 신준호 회장(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막내 동생)에게 심 회장의 어려운 처지를 이야기해 3,000만 원의 도움을 받도록 가교 역할을 했습니다. 또 칠순잔치까지 성대하게 치러 그 수익금 700만 원을 자신을 키워준 심 회장에게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유통업을 하는 친구인 전인욱(1962년 생)에게 부탁하여 심 회장에게 각종 생필품을 꾸준히 지원하도록 배려했습니다. 이 같은 스토리는 복싱계의 소리 없는 미담으로 참 흐뭇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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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자 회장에게 유통업을 운영하는 친구 전인욱 씨를 소개하고 있는 장정구 전 챔프.


따지고 보면 지금 제가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심영자 회장의 덕이 큽니다. 저에게 아마추어 복싱팀인 용산공고팀과 문성길 최요삼 임성태 등 좋은 선수를 맺어줘 아마와 프로를 넘나들면서 폭넓게 활동하도록 초석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어느 누구는 저를 뭍과 강을 넘나들며 활동하는 양서류인 ‘개구리’라고 표현하더군요. 어쨌든 심 회장으로 인해 아마, 프로의 구애받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는 발판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 한국 프로복싱은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떨어질 대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어느 누군가는 지금의 한국 복싱을 시냇가에서 낚시대를 드리우면서 고래잡이를 꿈꾸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어렵다는 의미겠죠.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울고, 또 기울면 다시 차는 법입니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속담이 있듯이 한국복싱에 반전의 기회가 분명 있고, 복싱인들이 대동단결하면 옛 영광을 재현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지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실이 암담할 때 안 될 수밖에 없는 핑계를 대며 주저앉지 말고, 잘 될 수 있는 방법을 서로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 민족이 일제강점기에 시름하던 1929년, 그 절망의 시기에 동아일보에 발표된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동방의 등불’이 생각납니다. 그 글의 서두가 지금의 한국복싱과 오버랩되기 때문입니다. 코리아 뒤에 ‘복싱’이라는 두 글자를 넣고 싶네요.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이었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영원한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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