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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포츠 타타라타] ‘복싱계의 간서치’ 조영섭 관장
# <무식한 대한민국...진지 빨지 말고 책 치워라>. 2014년 7월에 나온 기사인데 최근 소셜미디어를 통해 접했다. 내용은 한 마디로 충격. 요즘 학생들이 시험이나 취업에 도움이 되는 것만 공부할 뿐 좀처럼 책은 읽지 않는다고 한다(물론 성인은 더 하다).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는 “책 안 읽는 시대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암울하다”고 탄식했단다. 가진 것 하나 없는 한국이 최빈국에서 반세기만에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사람’ 덕이었다. 그리고 머리 좋기로 소문난 한국은 원래 독서열이 아주 높았다. 책읽기라면 독일이나 일본이 부럽지 않았다. 글쓰기전문가로 유명한 신향식 원장(산우성논술학원)은 “학원에 보내는 것보다 책을 많이 읽히는 것이 성적향상의 지름길인데 한국 부모들은 이를 기다리지 않는다. 고등학교 교사가 해리포터를 읽고 있는 학생에게 책을 뺏으며 ‘수학문제나 하나 더 풀라’고 주문했다고 하니 끔찍하다”고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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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쯤에서 책 한 권 강추. <책만 보는 바보-이덕무와 그의 벗들 이야기>(보림출판사). 얼마전 이 책을 읽고 깜짝 놀랐다. 이런 창해유주(滄海遺珠)가 있다니. 중학생 이상이라면 필독을 권한다. 이덕무는 독서로 신분(서자), 가난, 외모 등을 극복한 조선시대 선비다. 정조에게 발탁돼 규장각의 초대 검서관으로 임명됐다. 간서치전(看書痴傳)이라는 이덕무의 자서전을 현대적으로 풀어쓴 이 책은 읽는 재미와 감동도 있고, 실용적으로는 학창시절 배웠던 실학파의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유득공, 백동수 등이 무슨 일을 했고, 무슨 책을 썼는지 저절로 이해되고, 암기가 되는 효과가 있다. 어쨌든 간서치(책만 보는 바보)가 많으면 좋으련만, 요즘은 3S에 스마트폰까지 더 해져 4S의 시대라니 씁쓸하다.

# 학원스포츠가 고스란히 프로(혹은 성인)스포츠로 이어지는 한국적 현실에서 청소년 운동선수들이 공부를 등한시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학과공부도 따라가지 못하는 판이니, 독서와는 더욱 멀 수밖에 없다. ‘공부하는 운동선수.’ 말은 멋있지만 경쟁이 치열한 한국에서는 아직까지는 현실적이지 않다. 운동 중에서도 특히 복싱과 같은 격투기는 이상하게도 공부와 거리가 멀다. 운동을 관뒀을 경우 주먹세계로 빠져는 일이 타종목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그런데 링 주변을 온통 책으로 장식해 놓은 복싱체육관이 있다. 그리고 이 복싱코치는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얘기하다가도 관련된 내용이 나오면 사람 이름은 물론, 구체적인 연도와 날짜까지 줄줄 토해낸다. 유명 연예인들의 생년월일에서 백제 개로왕이 죽은 날까지 나온다. 복싱계에서는 이걸 보고 놀란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처음 접하는 이는 절로 웃음이 터질 정도. 서울 둔촌동에서 문성길복싱다이어트클럽을 운영하고 있는 조영섭 관장(52)이 그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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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둘러 쌓인 자신의 체육관에서 포즈를 취한 조영섭 관장.

#조영섭 관장은 군산남초와 군산남중 재학 당시 야구선수로 뛰었다. 해태 출신의 조계현, 백인호가 동기다. 하지만 육성회비도 낼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것이 문제였다. 회비 5,000원을 내지 못해 여러 친구들 앞에서 수모를 당했다. 감독은 합숙훈련에서도 그를 제외시켰다. 그 수모는 뼛속 깊은 한이 됐다. 조영섭은 군산고로 진학하면서 야구를 버리고, 몸으로 때우는 복싱을 택했다. 돈 없는 설움, 성공에 대한 열정이 강했기에 금세 두각을 나타냈다. 승승장구하며 특기자로 용인대로 진학했고, 1983년 로마월드컵 2차선발전 결승에서 당시 국가대표였던 권채오(한국화약)를 꺾고 우승하기도 했다(최종선발전에서 그 유명한 허영모에게 패했다). 아마전적 32전 27승 5패(19KO)를 남기고 프로로 전향해 이번에는 세계챔피언을 목표로 분노의 주먹을 휘둘렀다(88체육관 입관 1기생). 프로 초반 7전 전승 4KO로 경량급답지 않은 묵직한 주먹을 휘두르며 언론에 ‘세계챔피언 기대주’로 소개됐다. 하지만 1986년 스물둘의 나이에 치명적인 다리 골수염이 도지며 은퇴하고 말았다. 프로통산 10승 2패(4KO). 그리고 쓸쓸히 고향 군산으로 낙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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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섭 관장의 프로 시절 모습.

#고향에서 이것저것 다 해봤지만 평생 운동만 한 놈이 애착을 가지고 할 일은 없었다. 이에 1989년 4월 단돈 2만 원을 들고 상경했다. 25살. 복싱 지도자로 성공하는 것이 꿈이었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다. 용산공고 복싱팀 코치를 맡았는데 고(故) 최요삼을 비롯, 최준욱(한체대 진학) 임계룡(동아대 진학) 홍성민(용인대 진학) 등 재목들이 많았다. 3년 만에 전국대회 종합우승을 달성해 화제를 모았다. “아마추어 시절 1, 2, 3등을 모두 해봤는데 지도자로도 금세 종합우승을 비롯해 2, 3등을 모두 해봤죠. 복싱에, 그리고 가난에 한이 맺혔기에 정말이지 혹독하게 가르쳤는데 잘 따라준 선수들에게 감사할 뿐입니다.” 1999년 서울체고 코치 시절에는 MBC 권투신인왕전에서 최우수선수상을 받은 국나남을 발굴하는 등 최우수 지도자상을 받았다.

#조영섭 관장은 독하다. 용산공고 시절에는 합숙소가 없자 아내를 처갓집으로 보낸 뒤 자신의 집에서 15명의 선수들과 합숙생활을 했다. 훈련도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혹독했다. 6년 6개월 이나 트레이너를 맡은 최요삼은 가장 많이 ‘당한’ 선수였다. 2008년 1월 최요삼이 세계타이틀매치 도중 쓰러져 운명을 달리하자 누구보다 가슴이 아팠다. 조의금 200만원을 건넸는데 사정을 잘 아는 동생(최경호, 현 프로모터)이 “관장님, 요삼이 형은 저 하늘나라에서 관장님을 이해할 겁니다”라고 말하자 눈물을 쏟고 말았다. 얼마 전에는 선수시절 자신에게 맞아서 귀를 다친 제자(이제는 형사가 돼 있었다)를 우연히 만났는데 미안함에 얼굴을 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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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섭 관장(오른쪽)과 고 최요삼 선수의 모습.

#선수들에게만 혹독했던 것이 아니다. 늘 스스로를 다그쳤다. 무명 지도자 시절에 제자들이 게임에서 이기고도 판정에서 지는 일이 있었다. 승부는 주먹으로만 판정되는 게 아니란 걸 깨닫고 1년에 100통이 넘는 편지를 심판들에게 보내고 애경사를 찾아다니면서 발품을 팔았다. 또 운동선수는, 복싱선수는 무식하다는 말이 듣기 싫어 시간이 나면 책을 읽었다. 읽고 또 읽고, 고유명사나 연도는 아예 외우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듣는 사람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온갖 것을 다 기억하는 남자'가 된 것이다.

#단지동맹을 맺은 안중근 의사와 황산벌로 향하는 계백장군의 결기를 모토로 삼았기 때문일까, 조영섭 관장은 둔촌점, 명일점, 송파점 등 한 때 4곳의 프랜차이즈 복싱체육관을 운영하며 성공가도를 달렸다. 한때 선배에게 “배고파서 죽겠으니 밥을 사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한 후 집에 와서 수돗물을 마시며 울었지만 지금은 먹고 살만하다. 불경기로 체육관은 2개로 줄었지만 지금도 늘 체육관을 지키고, 그리고 복싱계 만물박사답게 인터넷에 복싱칼럼(조영섭의 一事一言)을 연재하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권투연맹(KBF)로부터 새롭게 창간하는 복싱잡지의 편집장으로 위촉받기도 했다. “저는 치열하게 살았고, 복싱은 스포츠 중 가장 치열한 스포츠죠. 요즘 복싱인기가 많이 죽었는데, 저는 그럴수록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해요. 복싱과 복싱인에 관한 글을 쓰는 재미로 삽니다.”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조영섭의 글은 복싱마니아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복싱계 간서치’가 쓰는 글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헤럴드스포츠=유병철 편집장 @ilnamhan]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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