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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잉글랜드 감독은 외로워 - 이준석의 킥 더 무비<마이크 바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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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월드컵

월드컵 시즌만 되면 전 세계가 들썩입니다. 꼭 자국이 출전하지 못해도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축구를 발명했다고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는 종주국 잉글랜드의 월드컵 맞이는 어떨까요?

사실 잉글랜드는 매 월드컵 마다 마치 우승이라도 할 것처럼 온갖 요란을 다 피웁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거두고는 온 나라가 절망이나 분노에 빠져 다시 소란을 피우기로 유명합니다. 사실 월드컵 본선에 아예 못 나온 적도 여러 번 있습니다.

잉글랜드에서 발행되고 전 세계인들이 즐겨 읽는 축구 잡지 「포포투(Four Four Two)」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이 끝난 뒤에 또다시 졸전을 펼친 잉글랜드로 인해 한바탕 뒤집어진 현지의 분위기를 비꼬기도 했습니다. 스코틀랜드나 프랑스, 독일처럼 평소 잉글랜드 축구팬들과 사이가 안 좋은 나라 사람들은 잉글랜드를 비웃곤 하죠.

이런 잉글랜드의 야단법석을 비꼬는 블랙코미디 영화를 소개할까 합니다. 바로 <마이크 바셋(Mike Bassett: England Manager)>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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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감독으로 산다는 것

이 영화는 사실이 아닌 가상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배경도 2002년 브라질 월드컵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2002년 월드컵은 우리나라와 일본이 공동 개최를 했죠.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2002년 월드컵이 브라질에서 열린다는 가정 하에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여 줍니다.

월드컵 예선을 코앞에 두고 잉글랜드 감독이 심장마비로 혼수상태에 빠집니다. 이에 잉글랜드 축구 협회는 새로운 감독을 물색하지만 모두가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사양합니다. 대표팀 감독을 사양한다는 게 언뜻 이해는 안 가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왜 다들 감독 자리를 피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명망 있는 감독들이 모두 사양하고, 잉글랜드 축구협회는 결국 시골 클럽인 노위치(Norwich)를 컵대회 우승으로 이끈 마이크 바셋을 감독으로 추대합니다. 거의 폭탄 돌리기 수준으로 골치 아픈 자리를 떠넘긴 것이지요.

감독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많은 기자들이 마이크 바셋의 집을 에워싸고 그의 사생활을 캐기 시작합니다. 타블로이드 신문에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실리고, 심지어 집에서 알몸으로 있는 사진이 1면을 장식합니다.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되는 순간부터 마이크 바셋의 가족들은 매일매일 악몽에 시달립니다.

그래도 마이크 바셋은 기자회견장에서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겠노라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1966년 홈에서의 우승을 빼고는 우승 경력이 없는 잉글랜드. 그런 목표는 너무 비현실적인 것 아니냐며 기자들이 냉소를 보냅니다. 그러자 마이크 바셋은 잉글랜드가 축구를 발명한 나란데 왜 우승을 못하겠느냐며 큰소리를 치죠. 그리고 잉글랜드의 전매 특허인 4-4-2 포메이션으로 승리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합니다.

마침내 소집된 대표 선수들. 하지만 하나같이 뭔가 나사가 빠져 있습니다. 주차장은 선수들의 값비싼 스포츠카들로 가득합니다. 선수들은 다들 훈련에는 관심 없고 방송 출연이나 연애 등에만 신경을 씁니다. 막상 실력을 보니 수준 이하입니다. 수년간 골대 위로 홈런만 날려 온 스트라이커, 툭하면 상대 선수랑 시비가 붙어 폭행을 일삼는 주장까지.

마침내 폴란드와의 첫 평가전이 열립니다. 웸블리 스타디움(Wembley Stadium)에는 흰 바탕에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잉글랜드의 국기, 성조지 깃발(St. George’s flag)을 든 서포터들이 넘쳐납니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마치 이미 이긴 것 마냥 의기양양한 잉글랜드 팬들. 하지만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형편없는 경기력에 팬들은 할 말을 잃습니다. 졸전 끝에 패배하자 열광하던 팬들은 폭도로 돌변해 감독과 선수들을 향해 온갖 야유를 퍼붓습니다. 타블로이드 신문을 포함한 기자들은 마치 대역 죄인을 심문하듯 마이크 바셋 감독을 몰아 부칩니다.

월드컵 예선이 시작되자 상황은 더욱 비참해 집니다. 예나 지금이나 4-4-2 포메이션과 ‘킥 앤드 러시(kick and rush)’ 축구만 구사하는 잉글랜드 대표팀의 전술은 이미 상대에게 간파 당한 상태입니다. 졸전 끝에 월드컵 예선 탈락의 위기에 몰린 잉글랜드. 하지만 마지막 경기에서 최약체 룩셈부르크가 터키를 이기는 기적을 일으키고, 가까스로 잉글랜드는 터키를 제치고 월드컵 본선에 진출합니다.

월드컵에 탈락했다고 자포자기하며 비난을 퍼붓던 잉글랜드 언론과 축구팬들은 갑자기 돌변해서 대표팀과 자국 축구를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선수들 역시 졸전은 까먹고 마치 우승이라도 한 듯 의기양양해 하죠. 유명 팝 스타와 월드컵 송도 같이 녹음합니다.

마침내 브라질에서 월드컵 본선이 시작됩니다. 첫 경기는 북중미의 강호 멕시코. 멀리서 날아온 잉글랜드 팬들은 경기장을 가득 채우고 역시나 의기양양해 합니다. 하지만 경기가 시작되자 또 다시 잉글랜드는 졸전을 펼치고 잉글랜드 축구팬들은 입을 멍하니 벌린 채 허탈해 합니다.

0:4의 대패. 언론과 미디어는 온갖 수사를 동원해 감독에 대한 비난을 퍼붓습니다. 잉글랜드 축구팬들은 또다시 폭도로 변해 브라질 시내 곳곳에서 각종 시설을 부수고 경찰관들과 대치합니다. 또한 성난 일부 서포터들은 대표팀이 머무는 호텔 앞에 진을 치고 비난의 구호를 외쳐 댑니다.

두 번째 경기는 약체 이집트. 꼭 승리할 것이라 믿던 잉글랜드 선수들은 이 경기에서도 졸전을 펼치며 0:0으로 비깁니다. 마침내 인내심이 극에 달한 마이크 바셋은 선수들을 향해 온갖 욕설을 퍼붓고, 언론들은 감독을 해임하라며 난리가 납니다.

이제 마지막 경기, 바로 숙적 아르헨티나입니다. 포클랜드 전쟁과 마라도나의 ‘신의 손’ 사건으로 앙숙이 되어 버린 두 나라. 과연 마이크 바셋이 이끄는 잉글랜드 대표팀은 승리할 수 있을까요? 마이크 바셋은 겉으로는 화를 내면서도 뒤로는 넘쳐나는 기삿거리에 신이 난 타블로이드 신문과 흥분한 잉글랜드 팬들에게 보기 좋게 한 방을 먹일 수 있을까요?

타블로이드 신문, 4-4-2 포메이션, 극성 훌리건

이 영화는 비록 가상의 이야기이지만 실제 사례들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2010 남아공 월드컵 당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스타들로 구성되어 의기양양해 하던 잉글랜드 대표팀은 첫 경기 미국전에서 선제골을 넣고도 골키퍼의 어이없는 실수로 동점골을 내줘야 했습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는 첫 경기인 튀니지 전이 끝나고 흥분한 잉글랜드 훌리건들이 마르세유 시내에서 튀니지 팬들과 패싸움을 벌이며 난동을 피웠죠. 재미있는 건 극렬 훌리건으로 분류되어 월드컵 기간 동안 프랑스 입국이 금지되었던 사람들도 그 현장에 있었다는 겁니다. 알고 보니 거의 반 년 전부터 프랑스에 건너 와 아르바이트를 하며 월드컵만 기다렸다고 하네요.

잉글랜드의 타블로이드 신문들의 활약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제라드가 술집에서 주먹다짐을 하거나 베컴과 퍼거슨 감독이 축구화를 던지며 싸우던 사건, 아니면 루니가 유흥업소를 출입하는 일들이 있으면 어김없이 대문짝만한 사진과 함께 타블로이드 신문에 대서특필되곤 하죠.

잉글랜드는 축구 종주국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월드컵에서 부진한 성적을 보여 왔습니다. 1994년 월드컵, 유로 2010에서는 아예 본선 무대도 밟지 못했고, 본선에 올라온다 하더라도 대개는 16강이나 8강에서 고배를 마시며 우승후보와는 동떨어진 기량을 보여주곤 했습니다. 가장 최근엔 2012 런던 올림픽에서 홈팀의 이점을 누리면서도 우리나라에게 8강전에서 승부차기로 패배해 종주국의 나쁜 징크스를 이어 갔죠.

이 영화는 이처럼 실제로도 계속되고 있는 잉글랜드 축구계의 씁쓸한 면들을 풍자하고 있는 것이지요. 마이크 바셋 감독은 결국 기자회견장에서 『정글북』으로 유명한 작가 키플링(J.R. Kipling)의 시 ‘만일(If)’을 읽어내려 갑니다. 어른이 되기 위해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모순된 자격과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그 시의 내용에 모두가 숙연해집니다.

#글쓴이 이준석은 축구 칼럼니스트이며 현재 비뇨기과 전문의이다. 이 글은 저자가 2013년 3월 펴낸 《킥 더 무비-축구가 영화를 만났을 때》를 재구성한 내용이다. 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한 감상평으로 축구팬들로부터 스포츠의 새로운 면을 일깨우는 수작으로 큰 호응을 받았다(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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