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청라의 한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서 있던 벤츠 전기차에서 난 불이 대형 화재로 번진 데 이어, 6일 충남 금산군에서도 충전 중이던 기아 전기차에서 불이 났다. 열폭주(배터리의 연쇄적 폭발)현상으로 좀처럼 불길을 잡기 어려운 전기차 화재가 잇따르면서 공동주택 주민들 사이에 ‘전기차 포비아(공포증)’가 확산되고 있다. 전기차 차주들은 ‘잠정적 죄인’ 취급을 받고 있고 전기차 지하주차장 이용 문제로 주민들간 얼굴을 붉히는 일도 잦아졌다.
금산에서 불이 난 기아차는 차량 아래에서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는 점을 근거로 소당 당국은 배터리를 발화점으로 의심하고 조사 중이다. 청라 화재와 관련해서도 경찰은 8일 시작된 정밀 감식에서 이 차에 장착됐던 중국 업체 파라시스 배터리를 면밀히 살피고 있다. 배터리가 화재의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전기차 소유자들 사이에서는 “내 차 배터리는 누가 만들었지?”라며 정보를 찾는 소동이 벌어지고 있다. 국내에서 영업하는 자동차 회사 중 배터리 제조사나 원산지 등의 정보를 선제적으로 공개하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청라 화재 직후 벤츠 전기차에 세계 1위인 중국 CATL에서 만든 배터리가 탑재돼 있었다는 얘기가 퍼졌다. 그러나 나흘 뒤에야 세계 10위 파라시스 제품이라는 게 확인됐다. 모든 수입차가 배터리 제조사를 원칙적으로 공개하지 않고 있는 탓이었다. 일반 소비자 사이에서는 “동네 식당에서 파는 음식도 원산지까지 세세하게 공개하는 시대에, 수천만~수억 원짜리 전기차에서 생명과 직결되는 배터리의 정보 공개가 ‘깜깜이’란 게 말이 되느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현재 국내 자동차관리법은 자동차의 다양한 제원을 공개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여기에 배터리는 포함돼 있지 않다. 자동차 회사와 배터리사 역시 기업 간 계약이라는 이유로 제조사 공개를 꺼려왔다. 반면 선진 시장은 배터리 관련 정보 공개를 더 강화하는 추세다. 유럽연합(EU)은 ‘디지털 배터리 여권(DBP)’ 제도를 만들어 2027년 2월부터 시행하기로 했다. 배터리의 예상 수명, 제조별 과정에서의 탄소 배출량 등 상세 정보를 디지털화해 이를 당국에 제출해야 한다. 우리도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는 제도적 정비를 서둘러야 한다.
정부는 환경부와 국토교통부, 산업자원부 등 관련 부처로 전기차 화재 TF(태스크포스)를 가동 중인데 배터리 제조사 공개는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소비자의 선택권과 알권리를 보장하는 토대이기 때문이다. 해외 저가·저질 배터리가 대형 참사의 화근이 되지 않도록 하려면 꼭 필요한 조치다. 아울러 전기차 대중화 시대를 대비한 화재 진압 장비 개발과 보급에도 속도를 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