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없는 학폭에 ‘편하게 죽는 방법’ 검색
“그저 너무 힘들다고 말할 공간 간절했다”
10대 고민상답 앱 개발…“청소년 쉼터로 거듭났으면”
김성빈 홀딩파이브 대표. 임세준 기자 |
[헤럴드경제=안효정 기자] 학교폭력, 진로, 이성, 부모님과의 갈등, 교우관계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10대들이 모인 공간이 있다. ‘홀딩파이브(holding 5)’라는 애플리케이션(앱)이다. 이곳에선 누구나 자유롭게 마음을 열고 자신의 속 이야기를 꺼내놓을 수 있다. 오가는 고민 상담에 공감과 위로, 응원의 말도 실린다. 홀딩파이브 덕분에 오늘을 버텼다는 회원들만 이젠 4만명이 넘는다.
4만명의 아픔을 아우르는 이 공간을 만든 사람은 20대 여성 CEO 김성빈 씨다. 29살의 젊은 나이지만 올해로 홀딩파이브 대표 10년차를 맞았다. 김씨는 “홀딩파이브는 사실 그 누구보다 스스로에게 필요했던 공간이었어요. 그냥 ‘나 오늘 너무 힘들었다’고 편히 말할 수 있는 공간이 그 당시엔 너무나도 간절했거든요”라고 말했다.
김씨의 ‘그 당시’는 10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가 고등학교 1학년이 되던 2012년. 김씨의 삶은 그 해를 기점으로 180도 뒤바뀌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안나요. 왜냐하면 학교 폭력은 ‘갑자기’ 일어나거든요. 갑자기 나를 둘러싼 공기가 달라지고, 갑자기 나를 대하는 친구들의 행동이 변해요.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꼼짝없이 당하게 돼요.”
2012년 어느 날, 김씨는 그렇게 ‘갑자기’ 왕따가 됐다. 평소 반갑게 인사 나누던 친구들의 눈빛이 싸늘해졌고 그들에게 말을 걸어도 투명인간 취급 당했다. 친했던 무리에 다가서면 활발하던 수다가 멈췄고 친구들은 서로 발맞춘 듯 흩어지기 바빴다.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반에서 생활했지만 김씨는 철저히 배제당했다.
용기 내 한 친구를 붙잡아 ‘혹시 나한테 화난 게 있느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돌아오는 건 ‘아니? 무슨 문제 있어?’라는 반문이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당황스러웠지만 문제 없다는 식의 친구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싶었던 김씨는 ‘그래, 내가 잘못 느낀 게 분명해’라고 자기 최면을 걸었다.
김성빈 대표는 “아직도 당시의 기억이 흉터로 남아있다. 그때 느꼈던 감정이 올라올 때면 나도 모르게 작아지곤 한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다. 김 대표의 그림자로 표현해본 그의 어두운 기억. 임세준 기자 |
하지만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김씨는 분명하게 혼자였다. 앉을 자리가 없어 교실 뒤에 서서 수업을 듣는 날도 늘어갔다. “당연히 남는 의자는 있었죠. 그런데 모두가 온몸으로 표현하는 거에요. 제가 옆자리에 안 앉았으면 좋겠다는 걸요.” 김씨가 그때를 회상하며 말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헛소문도 퍼졌다. 그가 몇몇 친구들에 대한 욕을 했다는 것. 한순간에 ‘뒷담화’의 장본인이 됐지만 억울함을 설명할 방법도 없었다. “저를 피하는 친구들을 따라다니며 잘못된 소문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없고, 전교생을 모아놓고 해명할 수도 없고…. 그저 소문이 사실이 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어요.”
처음에는 그래도 끝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제가 싫어지다가도 돌연 좋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사춘기니까요.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오래 가더라고요.” 답답함에 못 이겨 ‘잘못한 걸 알려달라, 그러면 사과하겠다’고 빌기도 했다. 그렇지만 왕따의 이유를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김씨는 ‘없는 잘못’을 찾기 위해 끝없이 자신의 과거 언행들을 파헤쳤고 혹시나 교실 속 오가는 말소리에서 단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귀를 열고 온갖 소리들에 집중했다.
그럴수록 따돌림은 심해졌다. 한번은 같은 반 아이가 의자에 올라서서 김씨를 향해 욕을 하고 가위를 집어던졌다. 다행히 피했지만 충격과 공포는 가시지 않았다. 어떤 친구로부터 ‘너 반응이 참 재밌다’는 말까지 들었다. “더이상 제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어요. 얼마나 내가 하찮으면 이런 일을 당하는 걸까 자책했고, 나는 친구들과 어울리면 안 되는 존재구나 생각했어요.”
쉬는 시간에는 엎드려 자는 척을 했고 점심 시간에는 교실에 혼자 남아 집에서 싸온 간식을 꺼내먹었다. 집에 오면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울었고 아침엔 눈을 뜨자마자 학교 가기 무서워 죽고 싶었다. 괴로움에 인터넷에 ‘편하게 죽는 방법’을 검색해 보기도 했다.
“정말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딨겠어요. 그런데 그땐 죽음 말고는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부모님께 학폭 사실을 털어놓았다. 김씨가 새벽에 베란다로 나가 창밖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몽유병 증상까지 보이자 참다 못한 부모님이 학교를 찾았다. 부모님이 직접 담임 선생님과 가해자, 학교 관리자 등과 면담을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오히려 상황은 악화됐다. 별 것 아닌 일로 부모님을 학교까지 오게 한 ‘마마걸’로 낙인찍혔다.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피해의식 있는 건 아니냐’는 말을 듣기도 했다. 계속되는 고통에 피폐해져가는 딸을 보고 부모님은 김씨에게 피해를 당할 때마다 그 사실을 육하원칙에 맞춰 구체적으로 공책에 기록하라고 일렀다. 그의 공책은 학생들 사이에서 ‘데스노트’로 불렸다. 김씨 공책에 적히면 끝장이라는 말이 돌면서다. 김씨는 “공책에 피해 내용을 쓰는 것 자체가 스스로를 지켜내는 방패였던 셈”이라고 말했다.
김씨의 고교 1년은 학폭에서 버텨내는 생활로 막을 내렸다. 2학년에 오르고 가해자들과 다른 반으로 배정받으면서 그는 가까스로 왕따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새학년 새학기에 사귄 친구들은 김씨가 다시 밝아질 수 있도록 도와줬다. 친구들로부터 ‘너와 친하게 지내다보니 소문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알겠다’ ‘넌 나쁜 애가 절대 아니다’ 등의 말을 들은 그는 조금씩 상처를 회복해나갔다.
김성빈 홀딩파이브 대표. 가림막을 찢고 나오며 활짝 웃는 모습을 부탁했다. 임세준 기자 |
“그때 알겠더라고요. 우리의 문제는 우리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걸요.” 김씨는 자신과 비슷한 아픔을 가진 아이들에게 다가가 친구가 되어주고 싶었다. 또래끼리 모여 고민을 공유하고 해결 방법이나 따뜻한 말을 주고받을 만한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쇠뿔도 단김에 뺐다. 앱 개발 기획서를 작성하고 닥치는 대로 기업 홍보팀들에 후원 요청 메일을 보냈다. 앱 이름도 지었다. 심리학 용어인 ‘홀딩 이펙트(holding effect·안아주기 효과)’와 ‘골든타임 5분’을 조합해 ‘홀딩파이브’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위기의 순간, 엄마의 마음으로 5분만 안아준다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는 사람의 불행도 막을 수 있다는 의미다.
다행히 한 앱 개발사 대표로부터 연락이 왔다. 앱을 제작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모아둔 2000여만원을 적극 투자한 김씨는 “머릿속으로 그려왔던 홀딩파이브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사실에 벅찼다”며 “꿈이 실현되던 순간이었다. 기적이 일어난 것만 같았다”고 했다.
사연을 올린 학생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해피인(멘토)’들도 생겼다. 무작정 메일로 홀딩파이브의 취지를 설명하며 해피인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자 가수부터 의사, 변호사, PD, 성우 등 각계 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응답했다. 가수 김태우 씨, 강지원 변호사, 성우 김종성·서혜정 씨 등 현재 100명의 해피인이 홀딩파이브와 함께하고 있다.
이제 김씨에겐 새로운 과제가 있다. 홀딩파이브의 업그레이드다. “지금까지의 홀딩파이브가 힘든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었다면 앞으로는 더 나아가 이 곳에서 아이들이 꿈과 희망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꼭 아플 때만 찾지 않는, 고민이 없어도 언제든지 들어와 힐링할 수 있는, 청소년 쉼터 같은 공간으로 업그레이드 하고 싶습니다.”
홀딩파이브 새 로고 [김성빈 대표 제공] |
새 단장을 하기 위해 홀딩파이브는 운영이 임시 중단된 상태다. 후원자가 없어 휴식기가 뜻하지 않게 길어지고 있다. 그는 “앱 기능을 확장시켜 홀딩파이브 2.0을 만들려면 기본 5000만~7000만원의 개발 비용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라며 “무모할 수 있지만 이번에도 직접 발로 뛰어가며 후원해줄 기업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여전히 우여곡절을 거듭하는 중이지만 김씨는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끝없이 도전할 것이라고 했다. 홀딩파이브에 올라왔던 극복 수기를 꺼내어보면 하루종일 허탕을 쳐도 다시 일어날 힘을 얻게 된다는 김씨. 가장 기억에 남는 수기는 한 중학생이 올린 글이었다.
“처음에 그 학생이 올린 글은 학폭에 시달리다 자퇴를 하고 자해까지 했다는 내용이었어요. 자살을 시도하려는 순간 홀딩파이브에 마지막으로 힘들어 죽겠다는 글을 썼는데, 그 글을 읽은 13명이 살아야 한다며 극복 방법 등을 댓글로 남긴 거에요. 그걸 보고 학생이 이 세상에 내 편도 있다는 걸 깨닫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대요. 죽을 생각 않고 열심히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는 극복 수기에 저도 울컥했어요.”
김씨는 홀딩파이브를 통해 마음의 병을 앓는 친구들을 품어주고 그들에게 ‘본인을 좋아해주는 사람은 충분히 많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고 했다. “저는 홀딩파이브에 가입한 친구들이 ‘우물 안 개구리’라고 생각해요. 친구들 저마다 벗어나기 어려운 울타리 안에서 고통받고 있어요. 저도 그랬고요. 그런데 제가 세상을 나와 보니까요. 저를 좋아해주고, 제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일깨워주는 사람이 정말 많은 거에요. 친구들도 이 사실을 알게 됐으면 좋겠어요. 여기서 따뜻한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본인들이 얼마나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인지 느낄 수 있게 해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