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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살이 20년, 은둔 생활 3년...화가 꿈꿨던 이비나의 ‘떠날 결심’
꿈을 잃은 무국적 청년들(상)
외국인 부모 둔 한국태생 2세
스스로 한국인이라 생각하지만
법적인 신분은 미등록 외국인
신청 문턱 높은 한시적 체류허가
주민번호 없어 검정고시도 못봐
저출생 시대, 품을 방법 찾아야
미등록 외국인 청년 이비나(22·가명)씨. 카페 벽면엔 이비나가 그린 그림이 걸려 있다. 박지영 기자

한국에서 태어나 20년의 ‘추방 카운트다운’을 세는 이들이 있다. 미등록 외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2세대 자녀들이다. 미등록 외국인을 ‘불법체류’로 볼지, ‘필요인력’으로 볼 지는 해묵은 논쟁거리다. 그러나 한국에서 나고 자란 자녀 세대는 이야기가 다르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친구들과 인생네컷을 찍고, 블랙핑크를 좋아할만큼 한국인 정체성이 크다. 1990~2000년대 유입된 미등록 외국인들의 자녀는 지금 하나둘씩 청년이 되고 있다. 이들의 정착 필요와 그 방안을 고민해볼 시기다.

“이비나(22·가명), 다시는 한국에 올 수 없어도 괜찮아?” 7년간 이비나의 한국 생활을 도와온 이형기(50)씨가 물었다. “네.” 대답은 짧았다. “미국으로 가면 다시 이방인이야. 부모님도 없고.” 이씨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각오하고 있어요.” 역시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비나는 한때 한국에서 화가를 꿈꿨던 미등록 외국인 청년이다. 미등록 외국인은 출입국·외국인사무소에 외국인 등록을 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아버지는 러시아 출신으로 피혁 공장에서 일을 하고, 페루 출신인 어머니는 식당 일을 하다 허리를 다쳐 쉬고 있다. 2년 전 시민단체 후원을 받아 전시를 열었다. 게임사 디자이너 면접을 보기도 했다. 일자리를 구하려 대전의 요리학교 진학을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국내 대학 진학을 위해 한국어 공부를 해온 지 3년 만이다. ▶관련기사 3면

이비나와 같이 미등록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가정을 꾸리는 과정에서 태어난 자녀 세대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하다. 안산시글로벌청소년센터 관계자는 “부모 세대는 한국에서의 삶이 힘들어 떠나려는 분들도 많지만, 부모가 떠나도 자녀들은 한국에 머물겠다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연고지가 한국뿐이라서다. 하지만 정작 한국에서 법적 신분을 보장받지는 못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인구 감소가 가파르고, 그래서 외국인 인력 도입이 가장 시급한 한국이 맞닥트린 ‘모순’이다.

▶“한국서 미술 전공하고 싶어” 꿈 키운 이비나=“좀 안타까운 애가 있어요.” 이비나가 졸업한 국제학교 교장 A씨는 7년 전 미등록 이주민 지원 단체 ‘넷임팩트’ 한국 지사 대표 이형기 씨에게 이비나를 이렇게 소개했다. 지원 대상을 소개해달라는 이씨에게 A씨는 “가장 학교도 오래 다녔고, 학년도 높은데 미래가 불투명해서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프리카계 출신이 많은 학생들 사이 홀로 백인 외양을 하고 있어 좀처럼 어울리지 못했고, 학교 밖에선 늘 단속 두려움에 시달렸다. 1년 동안은 이씨에게 속내조차 잘 털어놓지 않았다는 게 이씨의 회상이다. 7년간 이비나를 봐온 이씨는 이비나가 가장 밝았던 때와 어두웠던 때를 모두 기억한다. 이씨는 “학교 수업을 들으며 그림 쪽에 재능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이 지점을 북돋아주면서 이비나가 활짝 피기 시작했다”고 했다.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시민단체(유쾌한 반란) 이사장을 맡고 있을 당시, 이씨 소개로 이 단체 후원을 받아 전시를 열었던 것도 이때다. 당시 이비나는 김 지사로부터 직접 격려를 받았다. “이런 친구들에겐 기기도 직접 지원하라”는 김 지사 지적에 아이패드와 컴퓨터를 받기도 했다. 학교 인근 카페엔 아직도 이비나가 선물한 그림들이 걸려 있다. 게임 회사 청년인턴 디자이너 직무에 지원을 하기도 했다.

▶검정고시 보려니 교육청·법무부 ‘뺑뺑이’…“떠날래요”=이비나의 발목을 잡은 건 허무하게도 ‘검정고시’였다. 국제학교를 졸업한 뒤 이비나는 검정고시를 보고 국내 대학에 진학하겠단 목표로 한국어 공부를 해왔다. 주변에 다닐 한국어 학원도 마땅치 않아 유튜브에 직접 ‘한국어 공부하는 법’을 검색했다. 그런데 자신에겐 검정고시 응시 자격조차 없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 응시를 위해 입력할 주민등록번호가 없어서다.

이를 문의하려 교육청을 찾아갔지만 “주민등록번호가 없으면 법무부에서 국내거소신고증을 받아오라”는 안내를 받았다. 법무부에선 다시 “국내거소신고증을 받으려면 주민등록번호가 있어야 한다”고 안내했다.

차선책으로 학력을 인정해주는 대안학교에 다시 입학하는 방법이 있었지만, 이미 20대인 이비나가 교육 과정을 다시 밟기엔 부담이 컸다. 차라리 장학금 혜택이 많은 미국 대학에 입학해 생활 기반을 다시 마련하겠다는 게 이비나의 계획이다. 한국에서 20년간 함께 살아온 남동생이나 부모님과는 완전히 떨어져 살게 된다. 하지만 현재로선 유일한 방법이다.

“사람을 못 만나니까, 그게 제일 외로워요.” 경기도의 한 카페에서 헤럴드경제와 만난 이비나는 이렇게 말했다. 올해로 이비나의 은둔 생활은 꼭 3년째다. 그 사이 이비나와 가장 가깝게 어울렸던 친구 2명은 대학에 진학해 각각 피아노와 애니메이션을 전공하고 있다. “친구들을 생각하면 많이 부럽고 아쉽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일단 공부를 하겠다”며 이어온 게 한국어 공부였지만, 이마저 지금은 놓았다.

▶신청 문턱 높은 한시적 체류허가…사각지대 속출=정부에선 이비나와 같은 이주민 2세대에 ‘교육권’이라는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맹점이 많다. 법무부는 국내에서 태어나 6년 이상 체류한 미등록 미성년 이주민에 고등학교 졸업까지 학업을 위한 체류 비자(D4)를 주고 있는데, 2021년부터 내년 3월까지만 운영하는 한시적 제도다.

당초 법무부는 이 제도로 3000명이 구제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실체 신청은 작년 8월까지 700명대에 그쳤다. 이비나와 같이 대안학교를 나온 경우 신청 대상에서 제외된다. 본국에서 신청 과정에 협조하지 않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한 지역 외국인지원센터 관계자는 “체류자격 신청을 위해 여권을 내야 하는데, 일부 국가 대사관에선 여권 발행을 해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미등록 이주민을 국내에 무단 체류하는 ‘범죄자’로 볼지, 각종 기피 업종에 투입되는 ‘필수 인력’으로 볼지는 사회의 오래된 논쟁거리다. 그러나 적어도 자녀 세대에겐 다른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정동재 한국행정연구원 연구위원은 “자녀들은 부모의 위법 사실을 단순히 대물림 받아 제재를 받는 상황으로, 부모와 자녀 문제는 분리해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인구 감소에 대응해 외국인 유치 정책을 적극적으로 펴고 있는 만큼, 이런 미등록 2세대 규모 역시 점차 늘어날 전망이다. 그러나 정부에선 정확한 통계조차 잡고 있지 않다. 각종 수치를 근거로 한 학계 추정치가 전부다.

정 연구위원은 “전체 체류 외국인 중 미등록 체류자 비율, 전체 인구 중 아동 규모 등을 고려해 미등록 아동 및 청소년 규모는 최소 5만~7만명일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박혜원·박지영 기자

k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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