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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래神 vs 연기달인 vs 테너상...3인 3색 ‘조선인 최초 테너’ [고승희의 리와인드]
베일 벗은 뮤지컬 ‘일 테노레’ 순항 중
일제시대 ‘춘희’ 공연한 이인선 모티브
홍광호·박은태·서경수 트리플 캐스팅
다른 매력의 ‘윤이선’...보는 재미 쏠쏠
조선 최초의 테너를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 ‘일 테노레’의 홍광호(왼쪽부터), 박은태, 서경수 [오디컴퍼니 제공]

뮤지컬은 단 한 줄의 역사에서 시작됐다. ‘최초의 한국 오페라’인 ‘춘희(라 트라비아타)’를 무대에 올린 주인공. 일제강점기 동양 제일의 테너로 불린 성악가 이인선(1907~1960)에 대한 기록이다.

성악가 이인선을 소재로 한 뮤지컬이 무대에 올랐다. 예술의전당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일 테노레’다. 뮤지컬의 스토리를 쓴 박천휴 작가는 “실존 인물 이인선에게서 따온 건 딱 한 가지”라며 “1940년대 초반 의대생이었지만, 이탈리아로 유학을 가서 유명한 성악가에게 오페라를 배웠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일 테노레’가 주목받는 이유는 그간 나른했던 국내 뮤지컬 업계에 모처럼 등장한 신선한 소재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흥행이 검증된 대작, 혹은 베토벤과 모차르트·반 고흐와 같은 서양 위인이 주인공이었던 그간의 트렌드에서 벗어나 모처럼 우리의 역사에서 발굴한 인물의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다.

제작사 오디컴퍼니의 신춘수 대표는 “일제강점기라는 험난한 시대에 꿈을 가진 한 인간의 진정성 있는 서사를 담았다”며 “오페라 테너로의 꿈을 꾸는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보편성과 예술성을 확보해 세계 무대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조선 최초 테너 이야기의 탄생

이 작품은 2018년 우란문화재단에서 리딩 공연을 한 뒤 5년 만에 무대에 오른 초연작이다. 엄혹한 식민지 조선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에 다니며 성악을 배우고, 이탈리아 유학 후 조선오페라협회를 세운 테너 이인선에게 영감을 받았다.

작품에선 1930년대 경성에서 의대생 윤이선이 항일운동 단체인 문학회에 가입해 일제에 맞서는 오페라를 올리는 과정을 그렸다. 극중 조선 최초의 오페라로 등장하는 ‘꿈꾸는 자들’은 오스트리아 제국에 맞서는 베네치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작품은 마치 오페라처럼 보이지만, 이는 작품이 만든 일종의 무대적 장치다. 뮤지컬은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무대에 짜임새 있는 스토리, 시대상과 함께 일관되게 ‘꿈’을 그려간다. 혹독한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이 서로 다른 꿈의 조각이 마주하며 뮤지컬은 내달린다.

드라마를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은 전혀 없다. 브로드웨이 진출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을 만든 박천휴 작가와 윌 애런슨 작곡가 콤비는 작품 구상하면서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했다. 윌 애런슨 작곡가는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오리지널 스토리를 만들면서 지금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이야기인지 고민했다”며 “2시간 반이라는 시간 안에 명확하고 설득력 있는 이야기가 되도록 디벨롭했다”고 말했다.

뮤지컬과 오페라가 맞물리는 과정에서 음악이 단연 눈에 띈다. 윌 애런슨 작곡가는 “(음악은) 19세기 오페라 스타일과 미학을 지니면서 ‘일 테노레’ 이야기와 캐릭터에 어울리는 감정과 분위기를 지니도록 했다”고 말했다.

이 작품의 넘버(뮤지컬 노래)는 선율이 대중적이어서 따라하기 쉽다. 신작 뮤지컬의 최약점은 관객이 두 시간 내내 생전 처음 듣는 곡 10여개를 들으며 감당해야 한다는 데에 있는데, 이 작품은 주요곡의 모티프가 다른 넘버에 반복적으로 등장해 관객에게 이질감 없이 다가설 수 있다.

[오디컴퍼니 제공]

홍광호 vs 박은태 vs 서경수

‘일 테노레’가 특별한 또 하나의 포인트는 정통 뮤지컬 배우 3인방이 남자 주인공으로 나선다는 점이다. TV나 영화 같은 매체에 노출되지 않고 오로지 뮤지컬로 승부를 본 홍광호·박은태·서경수를 캐스팅 해 신작에 인색한 관객을 동원하는 ‘영리한 작전’을 썼다.

세 배우가 연기하는 윤이선은 내성적이고 순수하며, 꿈을 굽히지 않고 나아가는 반짝이는 청춘이다. 개성이 다른 세 뮤지컬 전문 배우들은 윤이선이라는 인물을 각기 다르게 표현해 어떤 공연을 봐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우선 홍광호(42)는 ‘노래의 신’이다. 2002년 ‘명성황후’로 데뷔한 이후, ‘지킬 앤 하이드’, ‘노트르담 드 파리’, ‘스위니토드’, ‘맨오브라만차’, ‘데스노트’, ‘물랑루즈’ 등에서 ‘원톱’ 남자 주인공을 도맡는 배우다.

홍광호의 윤이선은 170분(인터미션 포함) 간 ‘노래 차력쇼’를 선보인다. ‘일 테노레’의 넘버는 관객에겐 감미롭기 그지 없지만, 배우에겐 무척이나 까다롭다. 조선 최초의 테너와 오페라를 소재로 가져온 만큼 음악 장르가 오페라부터 가곡, 발라드 등으로 다양한 탓이다. 홍광호는 단 한 번의 음이탈 없이 완벽한 노래로 윤이선을 만들었다.

특히 작품 속 윤이선은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은 인물에서 음악을 만난 이후 자신감을 얻으며 변하는데, 홍광호의 가창력은 윤이선의 강인한 의지를 더욱 확실하게 표현한다. 하지만 그의 완벽한 가창력은 극 초반 윤이선 캐릭터와 다소 어울리지 않은 듯 보인다. 그럼에도, 넘버마다 흔들림 없이 매끄럽고 완벽에 가까운 노래를 듣는 것은 관객에겐 축복이다.

박은태(43)는 ‘연기의 달인’이다. 올해로 데뷔 19년차. 2006년 ‘라이온 킹’의 앙상블로 뮤지컬계에 첫발을 디딘 이후 꾸준히 한 걸음씩 걸어 정상에 올랐다. 뮤지컬 ‘일 테노레’에서 그는 섬세한 캐릭터 표현과 대사, 노랫말 한 줄 한 줄에 실어보내는 감정 연기로 온전히 윤이선으로 분한다.

그의 윤이선은 ‘너드미(美)’(Nerd·괴짜)가 폭발한다. 구부정한 어깨에 금세 넘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걷는 내성적인 의대생. 모든 말들이 조심스러우면서도 수줍고, 순수해서 해맑은 경성의 대학생을 ‘찰떡’같이 표현했다.

특히 박은태는 일상의 대화를 하듯 자연스러운 대사 처리가 인상적이다. 윤이선이 ‘음악의 세계’를 만나 꿈을 꾸고 이상을 그려나가며 마주하는 변화가 노래에도 묻어난다. 발성, 음량, 표정을 달리하며 테너로 성장하는 모습, 시대 앞에서 좌절하는 꿈 많은 청년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렸다. 다만 미성과 고음이 장점인 박은태가 소화하기에 난도 높은 넘버들에선 때때로 노래가 불안하게 들렸다.

막내 서경수(35)는 ‘확신의 테너상’이다. 2006년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로 데뷔한 서경수는 뮤지컬 업계에서 ‘방송 진출’ 없이 나름의 팬덤을 확보한 마지막 30대 배우로 꼽힌다. 서경수는 홍광호와 박은태의 장점을 조금씩 섞은 듯한 모습이다. 뮤지컬 ‘베어 더 뮤지컬’로 이른바 ‘킹카’ 전문 배우로 불렸고, ‘썸씽로튼’으로 한국뮤지컬어워즈 남우조연상을 받은 그는 매 작품 ‘인생캐(인생 캐릭터)’를 경신했다. 캐릭터성이 강하고, 재치와 유머를 두루 갖춰 관객을 쥐락펴락 하는 인물을 주로 소화해왔다 보니 실존 인물이자 다소 평범해 보이는 윤이선은 그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노래는 합격이다. 폭넓은 음역대로 저음부터 고음까지, 진성부터 가성까지 아우르며 노랫말 마다 감정을 더한 점은 강점이었다. 하지만 대사 연기는 아쉬웠다. 소극적인 윤이선을 보여주는 장면들에서 대사를 통한 감정이 와닿지 않았다. 그럼에도 윤이선의 성장 과정을 무난하고 자연스럽게 보여줬다.

조선 최초의 테너를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 ‘일 테노레’의 홍광호 [오디컴퍼니 제공]

노인 윤이선의 ‘꿈의 무게’ 명장면으로 꼽혀

세 배우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깊은 감동을 안기는 명장면은 바로 노인이 된 윤이선이 부르는 넘버 ‘꿈의 무게’를 부르는 부분이다. 세 사람은 치열하게 살아온 윤이선의 모든 순간을 ‘시간의 길이’가 묻어난 음성과 호흡으로 담아내며 깊은 감동을 안긴다.

서로 다른 애드리브가 튀어나오는 장면을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여주인공 진연(김지현·박지연·홍지희 분)과 함께 극중 오페라 ‘꿈꾸는 사람들’의 대본을 보며 애정 행각을 벌이는 장면에서 나오는 대사와 반응이 저마다 다르다. ‘너드’ 박은태는 “어떡하지?”, 수줍음의 탈을 쓴 홍광호는 “으악, 쟤랑 놀지마”, 순수한 서경수는 “미안해 진연아”를 외친다.

세 여주인공의 반응은 ‘킬링 포인트’다. 홍광호와 만난 박지연의 능수능란한 대처가 최고의 반응을 얻었다. 악보를 던지는 장면에서 웃음을 참다 차분한 대사 처리. “멀리 던지네.” 박지연이 악보를 주워와야 하기 때문이다. 관객은 허구와 현실을 오간 유체이탈 화법에 웃음이 터졌다. 박천휴 작가는 “다른 개성과 장점을 지닌 세 배우가 표현하는 세 명의 다른 이선을 보는게 참 매력적”이라고 했다.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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