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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엉망이어도 괜찮다고 말하고픈, 나를 찾는 무대”
청소년극 ‘탱크 : 0-24’ 여신동 연출가
작품 기획 7~8개월간 청소년 17명 만남
질풍노도의 10대 나를 다지는 시간으로
극장은 실시간 소통공간...관객이 주인공
청소년극 ‘탱크 ; 0-24’의 여신동 연출가는 헤럴드경제와 인터뷰에서 “이 작품을 시작하며 ‘나는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 나는 어른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됐다”고 말했다. 임세준 기자

‘탱크 ; 0-24(탱크 영투이십사)’. 0세부터 24세까지, 법으로 규정한 유년기부터 청소년기까지의 나이, 0시부터 24시까지 이어지는 하루의 시간.

“시간과 나이는 유연하다는 생각을 해요. 사회적인 나이와 달리 내가 인지하는 나이와 시간의 흐름은 다른 사람들의 속도와 다를 수 있으니까요.”

국립극단의 청소년극 ‘탱크 ; 0-24’(11월 19일까지·명동예술극장)가 무대에 오르는 과정은 여신동 연출가가 그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그것과 같았다. 최근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난 그는 “이 작품을 시작하며 ‘지금 나의 나이는 몇 살일까, 나는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 나는 어른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됐다”고 말했다.

▶나를 향해 ‘질문하는 연극’... “그래도 괜찮다고 말하는 무대”=‘WARNING(경고).’

무대 한가운데, 거대한 ‘게이트’가 세워졌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생처럼 어두컴컴한 무대, 그 위로 섬광처럼 빛나는 ‘경고’ 문구, 사람들은 각자의 삶을 살며 경고문 앞을 무심히 지나간다. 경고문 한 켠에 자리한 문이 열리면, 우주복을 입은 소녀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옷을 갈아입고 제 길을 간다. ‘나를 찾는 여행’을 마친 소녀의 일상 복귀. 여행을 마치면 돌아오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러니 두려워할 것도 불안할 것도 없다. 그 때, 또 다른 누군가가 그 문을 열고 들어가 ‘우주 탐사’를 시작한다.

‘탱크 ; 0-24’는 ‘질문하는 연극’이다. 연극이라 하기엔 추상과 감각으로 뒤덮인 이 작품은 여신동이 연출과 무대 미술, 구성을 모두 맡았다. 음악은 오혁이 했다. ‘0~24세’, 무엇이든 채워넣고 무엇이든 비울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시기를 제목 ‘탱크’에 담아 여신동은 또 하나의 공감각적 세계를 만들었다.

청소년극은 그에게 두 번째 시도다. 앞서 국립극단과 ‘비행소년 KW4839’이라는 작품으로 17~18세의 청소년들을 직접 만나 ‘탐구의 시간’을 가졌다. ‘탱크 ; 0-24’는 전작과 무관하나 그것의 심화편처럼 다가온다. 이 작품을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연구소와 기획한 시간만 7~8개월. 여 감독은 이번에도 17명의 청소년들과 만나고 리서치 팀과 탐구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는 “청소년들을 만나 나를 탐구할 수 있는 질문들을 던졌다”며 “‘탐사’라는 키워드를 가져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간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들여다보는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청소년기는 나를 인식하게 되는 시기예요. 저의 청소년 시절은 내가 나에 대해 알게 되는 첫 순간, 나를 직면하고 고민한 시작점이었어요. 마치 선악과를 깨무는 것처럼 무언가를 ‘탁’ 깨닫고, 내가 얼마나 엉망인 사람인지 알게 되는 때죠.”

아이들에게 던진 질문은 대단히 어렵거나 철학적인 것들은 아니었다. 여 감독은 “사실 그 질문들은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라고 했다. “너의 꿈은 뭐야?”, “오늘 뭐했어, 지금 괜찮아?” 조금 특별한 질문이 있다면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뭘 할 거니?” 정도다.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하면, 어른들은 정말 희한하게 아이들의 대답을 매우 궁금해 해요. 그런데 (아이들의 대답은) 지금의 우리와 다르지 않아요. 정치, 사회적 상황, 현재의 트렌드, 성별과 나이를 떠나 한 사람의 객체로서 자기 안의 가장 반짝이는 것이 나와요. 모든 생명체의 욕망과 이상은 너무나 똑같더라고요.”

연극은 거대한 우주, 즉 불모지의 탐사를 통해 나를 찾는 과정을 그린다. 숨막힐 듯한 침묵과 어둠이 무대로 내려앉는 시간은 관객에게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질문하는 무대’를 만드는 여신동 작품의 특징이다.

‘질풍노도의 시기’엔 마음도 달라지고, 외모도 달라진다. 내가 생각했던 나와는 너무도 다른 ‘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삶은 고단해진다. 여신동은 “돌이켜보면 나의 10대는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 많았고,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태어난 나 사이의 차이로 불행할 때도 있었다”며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나를 다지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작품을 통해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명확하다. 혼란스러운 지금의 나를 바라보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는 게 그의 메시지다. 여신동은 “지금의 너희가 엉망진창이니 완벽한 인간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엉망이어도 괜찮으니 나를 계속 들여다보고 용서해주고, 허락하고 응원하면서,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 연극”이라고 말했다.

연극이 끝나갈 땐, 나를 향한 질문들이 오혁의 노래와 함께 귓가를 맴돈다. “넌 지금 어디로 가고 있니”, “너의 행복은 뭐야” 등 나를 들여다보는 질문들이다.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오혁의 노래는 오랜 고민 끝에 낙점됐다. 그가 10대 때 만든 곡으로, 중2 감성이 투영됐다. 여신동은 오혁에 대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의 색은 다르지만, 지향점은 같은 예술가”라고 평했다.

▶ “내겐 관객이 주인공...극장과 연극은 살아있는 공간”=그에게 무대는 ‘하나의 세계’다. 무대 디자이너는 텅 빈 공간에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사람이다. 현재 여신동은 공연계의 ‘프로 N잡러’이지만, 그의 시작이자 지금도 한창인 무대 미술은 그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창작의 세계다.

여신동은 지난 몇 년 새 공연계에서 가장 많이 소환되는 창작자 중 한 명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무대 미술을 전공한 후 지난 2007년 ‘빨래’의 무대 디자이너로 데뷔했다. 이후 2010년 동아연극상 무대미술기술상, 2011년 한국뮤지컬대상 무대미술상, 2012년 대한민국 연극대상 무대예술상 등을 받으며 공연계의 촉망받는 예술가가 됐다.

모든 무대는 ‘대본’을 기반으로 하지만, 여신동의 무대는 조금 색다르다. 그래도 그의 무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대에 서는 배우와 연출가다. 그는 “아무리 아름다운 의상도 그것을 입는 사람과 어울려야 하는 것처럼, 세트 역시 그 공간에 있는 사람들과 어우러져야 한다”며 “이전의 무대가 나의 욕망을 담는 공간이었다면, 지금은 작품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디자이너로의 욕망’을 투명했던 여신동의 무대는 이제 덜어내고 비워내며 가벼워졌다. 그가 연출을 맡은 작품에서 특히 그 변화가 눈에 띈다. ‘탱크 ; 0 24’ 역시 군더더기 없는 상징적 무대에 조명으로 이미지와 의미를 덧댄다. 여신동이 정재일, 혁오, 새소년 등 대중음악 콘서트의 연출과 무대를 맡는 것도 그의 미니멀한 감각 때문이다.

여신동은 지난 2013년 연극 ‘사보이 사우나’를 통해 처음 연출을 맡은 후 연극은 물론 뮤지컬, 전시, 콘서트, 판소리, 무용 등 공연의 모든 장르를 섭렵하고 있다. 그는 ‘사보이 사우나’에 대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 나만의 세계에 빠져 대혼란의 잔치를 연출한 여신동의 살풀이”라고 돌아봤다. 이 작품을 통해 영화 ‘기생충’, ‘오징어게임’의 음악감독 정재일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다음 달엔 정재일의 세종문화회관 공연(12월 15~16일)의 무대 연출도 맡았다.

그의 모든 작품은 정부 지원금이 아닌 “은행 대출이 켜켜이 쌓인 ‘내돈내산’”으로 만들었다. 여신동은 “그래서인지 무대는 나의 생존방식이자 생계”라며 “무대 디자인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고, 더 좋은 디자인을 할 수 있고, 또 다른 작품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예술가로 거창한 목표는 없다. 그보다는 ‘좋은 사람’을 꿈꾼다. 좋은 사람이 좋은 예술을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바람이 있다면 관객들이 그의 무대에서 상상력을 피워내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공연장을 나설 때가 아니라, 공연을 보는 바로 이 시간 동안에다. 그는 “극장이 가지는 가장 큰 의미는 ‘라이브(LIVE)’”라고 확신한다. 그에게 극장은 ‘살아있는’ 공간이자, ‘실시간’ 소통을 하는 공간이다.

“극장이 만들어진 건 사람들이 무대에서 일어나는 일을 실시간으로 공감하기 위해서일 거예요. 그래서 연극은 더 대중적이고, 지금의 이야기로 살아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함께 하는 관객들이 지금 여기서 표현하는 것들을 가짜라고 느끼지 않으면 좋겠어요. 제겐 관객이 주인공이에요.”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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