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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도나도 로얄, 캐슬?” 길어도 너무 긴 아파트 이름, ‘펫네임’이라고? [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원인 미상의 붕괴로 서울 전역이 초토화 된 가운데, 유일하게 무사한 궁전아파트를 배경으로 벌어진 아파트 쟁탈전을 그렸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컷]

[헤럴드경제=김유진 기자] 장미, 개나리, 무지개, 은하수…. 흡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떠오르게 하는 단어들은 원래 아파트 이름이었다. 한글로 지어진 아파트 이름은 언제부턴가 달라졌다. 처음엔 영어와 불어 등 외래어로 시작해, 이젠 좋아 보이는 단어란 단어를 죄다 갖다붙여 외우기도 힘들 정도로 복잡한 이름도 나왔다. 아파트 브랜드 네이밍에 불어닥친 이 광풍, 근본있는 유행일까?

“쇼미더머니 찍는 줄”…길어진 아파트 이름 언제부터?
[광주광역시 아카이브]

“불지옥 아파트 갑니꺼” 푸르지오를 ‘불지옥’으로 발음하던 어르신들의 에피소드도 이젠 옛말이 됐다. 2023년 기준 전국에서 이름 제일 긴 아파트는 자그만치 25글자다. 전남 나주의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빛가람대방엘리움로얄카운티’ 1차와 2차다. ‘울산블루마시티서희스타힐스블루원아파트’, ‘동탄시범다은마을월드메르디앙반도유보라’ 등 20자 안팎인 곳도 여러 곳이다.

아파트 이름이 길어진 건 일명 ‘펫네임’(Pet Name)을 추가하는 게 유행처럼 번지면서다. 펫네임이란, 본명과는 다른 뭔가 특별한 애칭을 뜻한다. 아파트의 좋은 점을 부각해 애칭으로 삼은 닉네임인 셈이다. 흔히 근처에 강이 있으면 ‘리버’, 숲이 있으면 ‘포레’, 공원이 있으면 ‘파크’가 붙는다. 도심지와 근접하면 ‘센트럴’, 학군지엔 ‘에듀’ 등 외래어를 추가하기도 한다. 있어보이는 외래어’로 아파트의 장점을 부각한 고급화 전략이자, 집값 상승을 위한 마케팅의 일환이다.

이같은 추세는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부동산 정보 조사 업체 ‘부동산인포’에 따르면 2019년 분양된 전국 아파트 이름의 평균 글자수는 9.84자로 10자가 미만이다. 1990년대 4.2자에 불과했던 평균 글자수가 두배로 길어진 데 이어, 이젠 20자에 육박하는 아파트 이름까지 속속 등장하는 것.

인천 검단 AA13 입주예정자들이 지난달 17일 오후 서울 보신각 앞에서 집회를 열고 전면재시공 피해 특별법 제정, 주거대책 마련 등을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
이름만 번지르르…실체는 ‘철근누락’ 순살 아파트

아파트 이름은 날로 거창해지지만 신축 아파트의 부실 시공 논란은 어느 때보다 빈번하다. 입주를 앞둔 선분양제 아파트 주민들이 고대하던 내 집 곳곳에서 부실시공의 흔적을 발견하고 분개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건설 자재값 상승으로 인해 원가 절감을 위해 부실하게 짓는 건축물이 늘고 있다는 소식에 일각에선 ‘구축만 못하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시민들 역시 긴 이름을 선호하지 않고 있다. 서울시가 지난해 11월 1003명의 서울시민을 대상으로 ‘공동주택(아파트) 명칭 관련 조사’를 진행한 결과, 시민들은 아파트 이름의 적정 최대 글자수로 4~5글자(60.3%)를 가장 많이 꼽았다. 뒤를 잇는 응답은 6~7글자(16.4%), 3글자 이하(13.1%) 등이다. 같은 조사에서 응답자 과반인 58.6%는 명칭에 가이드라인이 있다면 편리할 것이라고도 답했다.

검단 아파트 지하 주차장 붕괴 사고 현장. [연합]
수식어 많아야 있어보인다?…“조선 王 이름은 ‘외자’”

이름값은 수식어가 필요 없을 수록 비싸다. 역사적으로도 그랬다. 조선 시대 왕족 중의 왕족인 왕들 역시 짧은 이름을 선호했다. 고려 때부터 이어진 관습이다. 왕이 될 수 있는 적통의 이름을 외자로 썼고, 두 글자 이름을 갖고 있던 왕들도 대부분 즉위 후엔 외자로 이름을 바꾸는 게 관례였다. 많고 많은 좋은 뜻의 한자어를 갖다붙인다고 좋은 이름이 되는 건 아니었단 뜻이다.

너도나도 유행따라 이름이 길어지는 최근 세태는 마치 “너도 나도 양반”을 외쳤던 조선 말을 보는 듯하다. 조선 후기 부를 축적한 하층민들이 양반 족보를 사거나 위조해 신분상승을 하면서, 양반 머릿수가 급속도로 늘어난다. 이전까지 조선 사람 10명 중 4~5명은 성씨가 없어, 백개의 성을 뜻하는 ‘백성’(百姓)에 포함되지 못한 경우가 상당수였다.

백성들 대다수가 양반이 되자 무슨 일이 벌어졌냐고? 양반 이름값이 휴지 조각이 됐다. 거품처럼 부풀어올랐다 사그라드는 유행의 수순을 떠올리게 하는 결말이다. 스키니진의 종말이 배기진의 재유행을 불러왔듯, 우후죽순 길어졌던 아파트 작명법도 조만간 달라지지 않을까.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원인 미상의 붕괴로 서울 전역이 초토화 된 가운데, 유일하게 무사한 황궁아파트를 배경으로 벌어진 입주민과 외부인의 아파트 쟁탈전을 그렸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컷]
‘꿈의 궁전’ 된 아파트, 콘크리트는 유토피아가 될 수 있을까

2020년 전후 시작된 부동산 광풍을 거친 대한민국에서 아파트라는 단어엔 꿈, 욕망, 희망, 좌절 같은 복잡다단한 의미가 응축됐다. 지난 개봉한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가 보여준 한국사회의 모습도 그렇다.

영화는 원인 미상의 재난으로 대한민국이 붕괴된 어느 겨울로부터 시작한다. 온 세상이 무너진가운데, 복도식 구축 아파트 ‘황궁아파트’만은 수직으로 우뚝 서있다. 옆동네에 설움을 당했던 과거는 과거일 뿐. 재난이 만들어낸 뉴노멀 시대는 황궁아파트 주민들을 하루 아침에 배타적 특권층으로 만들었다. 재난에 무너진 순살 아파트를 비웃는 영화 속 황궁 아파트의 위엄은 영화가 정점으로 달려갈 수록 점차 위태로워 보인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 황궁아파트.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틸컷]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부는 갈대 숲을 지나, 언제나 나를 언제나 나를 기다리던 너의 아파트.” 가수 윤수일이 1982년 작사·작곡한 ‘아파트’는 “아무도 없는 쓸쓸한 너의 아파트”라는 가사로 끝난다. 누군가는 생각할수록 쓸쓸하고 씁쓸할 단어, 아파트. 영화 속 유토피아가 어딘가엔 존재하길 바란다면 순진한 생각일까.

kacew@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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