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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산四色] 여행 갈망

온몸의 솜털까지 깨운 채 맞는 낯선 곳에서의 새벽. 일상의 먼지를 털어낸 만족감에 심신이 상쾌하다. 숙소를 나서 가능하면 먼 곳까지 걸어가 본다. 차 한 대만 지나가면 자욱한 흙먼지 속에 갇혀버리곤 했던 어릴 적 시골길(그땐 어디로든 멀리 도망가고 싶었다)에서 벗어나 뒷동산 숲길로 접어든 느낌이다. 새벽하늘에 미련처럼 걸려 있는 달, 준비 없이 불쑥 떠오르는 해, 이슬에 달려 반짝이는 풀꽃에 맘을 빼앗기다 홀로 저만치 걸어가는 자신을 만난다.

수년 전 걷기 동호회를 만들어 트레킹을 열심히 다닌 적이 있다. 안일한 삶에 대한 자기혐오와 거기서 비롯된 신체적 학대를 고상한 취미생활로 포장했던 측면이 크다. 서울이나 경기도 주변 트레킹 코스를 찾아다니다 한 달에 한두 번은 강원도, 경상도 등 제법 먼 곳으로 여행기분을 내며 다녀오기도 했다. 일상 탈출에 대한 갈망이 어느 정도 채워지니 숨쉬기가 훨씬 편해졌다.

그러다 일행 중 가장 부지런한 이가 병을 얻는 바람에 동호회가 해체 위기를 맞았다. 가끔 연락해서 멀지 않은 곳을 다녀오곤 했었는데 그마저도 최근에는 코로나로 뚝 끊겼다. 주말에도 집에 틀어박혀 ‘카우치 포테이토’ 생활에 몸을 맡긴다. 내쇼널 지오그래픽 채널의 와일드, 리얼리티, 푸드 프로그램을 오가고 EBS의 ‘세상의 모든 기행’도 이것저것 자주 골라 본다. 아프리카 오지도 가고 눈이 휘둥그레지는 중국의 대자연도 보고 이색 동식물이 가득한 오스트레일리아 대륙도 누빈다. 십 수년 전에 갔던 컬럼비아 대빙원이나 캐네디언 로키 등이 방영될 땐 자연의 경이에 숨이 멎을 것 같았던 순간을 떠올리며 감동에 젖기도 한다. 그러나 절대 눈요기로는 만족할 수가 없다. 손발 쓰고 마음 나누는 일에 대한 갈망이 커진다.

시간 많을 때 찬찬히 한 군데씩 돌아봐야지 했던 주말 사찰 기행을 시작해야겠다. 무리하지 말고 한 달에 한두 곳씩만 다녀보자. 먼 곳은 1박, 가까운 곳은 당일로 잡고 리스트를 추린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산속에 자리한 고요한 사찰은 내게 평화의 상징이고 사색의 공간이며 자연의 다른 이름이다. 가장 정직하게 나를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코로나가 진정되기를 기다리며 가고 싶은 곳을 검색하고 자료를 모으고, 주변 볼거리 먹거리도 찾아보고… 생각만으로도 즐겁다. 아무래도 1번은 눈덮인 사찰이 아닐까 싶다. 쉽게 갈 수 있는 곳부터 시작해야지. 너무 거창하면 시작도 못 하고 나가떨어질지도 모른다. 집에서 가까운 곳부터 물색해 보자. 그곳이 조계사여도 좋다. 조금 더 낡아지고 군데군데 손을 보고 덧칠을 하고 어색하게 새 기와를 얹었을지도 모르겠다. 주름을 감추려는 중년 여인의 화장처럼. 도심의 각진 풍경 속에 이질적인 모습으로 서 있는 일주문을 지나면 늘 단발머리로 기억되는 여고생들을 만날 수도 있겠다.

초등학교 동창으로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한 여고생 셋이 지리산 대원사를 간 적이 있다. 모처럼의 나들이를 하필 왜 절로 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절 마당에서 사진도 찍고 스님들과 말린 나물을 거두고 맷돌로 콩을 갈았던 것 같기도 하다. 친구의 그늘도 슬쩍 엿보았고 내 속도 잠깐 꺼내 봤던 그날의 짧은 여행이 사진 한 장으로 남았다. 무심하게 몇 달씩, 몇 년씩 연락도 없이 살아가지만 내 절친 명단엔 항상 그들이 있다. 언제 전화를 해도, 불쑥 찾아가도 어색하지 않을, 나를 닮은 친구들이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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