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개선 방안도 같이 내놔야”
#. 100인 규모의 IT업체에서 근무하는 개발자 A 씨에게는 밤낮이 없다. 오전 8시 30분까지 출근하는 A 씨는 오후 8시가 다 돼서야 퇴근을 한다. 평소 근무시간이 12시간에 육박하는 셈이다. 프로젝트가 있을 때는 밤을 새기 일쑤다. A 씨는 정부가 내놓은 사실상의 ‘주52 시간 근무제 시행 유예’를 놓고서 아쉬움을 표했다. 언제까지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를 해야 하나 한숨이 나왔다.
#. 현재 200인 규모의 제조업체 관리직 B 씨에게 정부의 이번 주52시간 근로제 유예와 ‘특별연장근로 허용범위 확대’ 조치는 달갑지가 않다. 정부안은 단순히 정책 시행을 ‘유예’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이지 못한 탓이다. B 씨는 “주 52시간 근로제가 시행되면 제조업체들은 인력 운용에 타격을 받는다. 대안으로 특별연장근로 허용범위 확대를 내놓는다면 구체적인 방안이 있어야 하는데, 두루뭉술한 안만 내놓으면 업체 입장에선 사실상 달라지는 게 없다”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19일 노동계와 재계 등에 따르면 50인 이상 300인 미만 중소·중견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주 52시간 근로제 처벌 유예 조치를 놓고서, 양측 모두 불만섞인 목소리를 내놨다. 정부의 정책 시행이 너무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게 공통된 주장이다.
정부는 18일 내년도 1월 1일부터 시행할 예정이던 50인 이상 300인 미만 기업체(중소·중견기업)들의 주 52시간 근로제 시행에 대해서 법정 노동시간 위반시간을 어기더라도, 처벌을 9개월 이상 유예하기로 했다. 아울러 정부는 주 52시간제의 예외를 허용하는 특별연장근로 인가 사유에 기업의 업무량 급증과 같은 ‘경영상 사유’를 포함하기로 했다. 특별연장근로는 기존에는 ‘재난 및 이에 준하는 사고 발생시’에만 허용돼 왔기에 이번 조치로 인가 요건이 완화된 셈이다.
주 52시간 근로제 시행을 ‘비정상의 정상화’로 보고있는 노동계는 갑작스런 제도 시행 유예가 당황스럽다. 아울러 근로시간 연장의 ‘편법 꼼수’로 이어질 수 있는 ‘특별연장근로’에 대해서 허용범위를 확대한다는 갑작스레 나온 정부의 조치에도 우려가 크다.
박준도 노동자의미래 정책기획팀장은 “주 52시간 근로제가 시행된 300인 이상 사업장에서는 실제 노동시간 단축이 이어지고 있다”면서 “원래대로라면 규모가 그것보다 작은 사업장에서도 내년부터 제도가 시행되는 것인데, 이를 유예한다는 게 당연히 달갑지 않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이런 상황에서 특별연장근로 범위를 넓히는 것은 근로시간늘리기의 또다른 꼼수가 될 수 있다”라고 봤다.
재계는 주 52시간 근로제 ‘폐지’가 아닌 ‘유예’라는 점이 불만이다. 정부가 주 52시간 근로제 시행 대안으로 내놓은 특별연장근로 범위 확대 대해서는 ‘구체적인 내용이 나오지 않았다’면서 우려섞인 목소리를 내놨다.
한 재계 관계자는 “노동시간을 단축한다는 근본적인 취지는 공감하지만, 주 52시간 근로제 시행으로 현재 산업 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한 해결 노력도 병행돼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정부가 주 52시간 근로제라는 가이드라인만 내놨지, 일선 산업현장에서 한 일이 뭔가 의문스럽다”라고 했다.
한 제조업체에서 관리직으로 근무중인 C 씨는 “주 52시간 근로제가 시행돼서 직원들 근로시간이 단축되면 생산 단가를 맞출 수 없다”면서 “지금 당장 정책이 9개월 연기된 건 긍정적이지만, 그렇다고 근본적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다. 하향식, 주먹구구식으로 시작된 이번 정책을 놓고 산업 현장에선 막막함만 가득하다”라고 하소연했다. 김성우 기자/zz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