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재 테스트 2개월 이상 걸려도 노력 지속
-디플도 30% 의존…시나리오별 대응책 모색
-가장 영향받을 것으로 알려진 화학도 비상대응
-소재업체 ‘원료교체 승인’ 신속행정에 사활
-TF구성 잠재품목 집중점검…재고확보 안간힘
일본 정부가 우리나라를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에서 배제하기로 결정한 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에서 윤석헌 금감원장(가운데)이 ‘금융상황 점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연합] |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 심사 우대국가)에서 배제하면서 한일 갈등이 ‘경제 전면전’으로 치닫는 가운데 국내 산업계는 일본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화학 등 간판산업의 ‘급소’를 집중 겨냥할 것으로 보고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4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일본 추가제재 영향권에 든 기업들은 지난달부터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하고 수출규제 가능성이 있는 품목을 집중 점검하는 등 시나리오별 대응책을 모색하고 재고 확보와 공급처 다변화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조경엽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화이트리스트 제재 품목 중에는 차세대 반도체 소재나 제조 장비, 자동차 관련 부품 등 국내 업계에 뼈아픈 품목이 포함돼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생산 차질이 빚어지고 산업 공급망 자체가 붕괴되면 경제적 파급 효과가 상당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반도체, 대체재 테스트 시간소요…재고확보 안간힘=지난달 일본 경제보복 1차 표적이 된 반도체 업계는 기존 수출규제 3개 품목 외에 다른 소재나 제조장비를 일본이 ‘핀셋규제’할 가능성이 높아 초비상 태세다. 반도체 제조공정의 핵심 원자재인 실리콘웨이퍼(반도체 기판)의 일본 의존률은 52.8%이며 포토마스크(회로패턴 전사용 원판)와 블랭크마스크(포토마스크의 원자재)의 경우도 의존률이 각각74.6%, 65.5%에 달한다. 또 반도체 제조장비 의존률은 무려 80~90%에 이른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는 수백개 공정 중 단 한 공정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제품 생산 자체가 되지 않는다”며 “품목별 일본 의존률의 경중과 상관없이 일본에서 전량을 수입해 대체 공급처가 아예 없는 품목이 포함되면 생산차질은 불가피하다”고 했다.
이에 삼성전자는 지난달 4일 일본이 수출규제를 발동한 직후 협력사에 일본산 부품의 90일치 재고 확보를 요청하는 등 컨틴전시 플랜(비상경영 계획)을 가동 중이다. 일본이 화이트리스트 배제 시행령 개정 후 추가 수출규제가 본격 시행되는 이달 말까지 최대한 원자재 수입을 늘려 물량을 확보하겠다는 방침이다. 시장조사업체인 디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고순도 불화수소 재고는 2.5개월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됐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일본산 이외의 제품 테스트에도 착수했다. 이들 업체는 품질 테스트에 2~6개월 시간이 걸리더라도 대체재 세부조성을 달리하거나 공급처를 다변화해 품질 검증을 지속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순도 ‘99.9999999999%’(트웰브 나인)로 알려진 일본의 고순도 불화수소(HF) 제품과 같은 수준의 품질을 기대하긴 힘들지만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순도가 조금 낮더라도 대체만 가능하다면 쓰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국내 소재 업체들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SK그룹 계열 반도체 소재 회사인 SK머티리얼즈는 최근 고순도 불화수소 개발을 본격화한다고 발표했다. 올해 말 샘플 생산이 목표다.
디스플레이 업계 역시 일본산 원자재가 전체의 30%가량을 차지해 사정권에 들었다. 이들 업체는 잠재적 수출규제 품목을 집중 점검하면서 중국산과 국산 등 대체재 확보에 나서고 있다. LG디스플레이는 일부 소재의 경우 현재 테스트 중이고 이미 상당히 진전된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日의존도 높은 배터리·화학 ‘단기충격’ 불가피=배터리와 화학업계는 일본산 고급 소재의 대체품을 찾기 쉽지 않아 단기적인 충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핵심소재 공장 건설 등 국산화율을 높이고 대체선 확보에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 중장기적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전망됐다.
배터리 업계의 경우, 배터리 셀을 감싸는 파우치, 양극재와 음극재를 접착시키는 고품질 바인더, 전해액 첨가제 등은 일본 의존도가 매우 높은 편이다. 특히 알루미늄 파우치는 일본의 DNP와 쇼와덴코가 대표적으로 전세계 점유율 70%를 차지한다. 국내에서는 율촌화학이, 중국에서도 일부 업체들이 파우치를 제조하지만, 전기차 배터리용은 일본제품을 대체할 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배터리의 4대 핵심소재(양극재, 음극재, 분리막, 전해액) 중 하나인 분리막도 아사히카세이와 도레이 등 일본에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다. 이에 국내 배터리 업체들은 대체선 확보에 적극 나서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분리막을 자체 개발해 조달 중이고, LG화학과 삼성SDI는 7월부터 일본산 분리막 물량을 줄이고 국산·중국산 등 물량을 늘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LG화학은 또 경북 구미에 5000억원을 투자해 양극재 공장을 건설하기로 했다.
화학업계는 정부가 백색국가 제외로 가장 영향받을 업종 중 하나로 지목돼 위기감이 더욱 고조되는 양상이다. 정부는 일본이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배제하면서 통제할 수 있는 857개 품목 중 159개를 집중관리 대상으로 분류했는데 이 가운데 화학제품이 40여개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기타석유화학 중간원료의 대(對)일본 수출액 의존도는 98.8%에 달한다.
특히 중간 소재를 생산해 국내 대기업이나 글로벌 기업에 공급하는 B2B(기업간거래) 업체들은 타격이 불가피하다. 원료 대체선을 찾는 것도 문제지만 공급업체에 바뀐 원료로 생산하겠다는 PCN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이 과정이 6개월에서 길게는 1년까지 걸릴 수 있다.
화학업계 종사자는 “화이트리스트 지정으로 대체원료를 찾는다고 해도 행정상 공백이 생기면 실제로 공장이 멈출 가능성이 크다”며 “이같은 절차를 간소화하는 등 추가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천예선·이세진 기자/cheo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