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국 프랑스 헌법 1조는 “프랑스는 비종교적ㆍ민주적ㆍ사회적인 하나의 공화국”이라고 적습니다. ‘사회적’의 뜻은 쉽게 말해 나라가 약자의 열악한 조건을 개선하겠단 의지의 발로입니다. 경제협력기구(OECD)에 따르면, 프랑스는 지난해 사회복지에 공공부문 지출 32%를 썼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비율입니다.
프랑스 파리의 비밀사교클럽 |
그런데, 이 나라 수도엔 ‘비밀사교클럽’들이 있습니다. 여기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그들만의 서클입니다. 프랑스의 정치ㆍ경제ㆍ사회분야 거물이 주요 회원입니다. 일종의 ‘귀족 전용 살롱’인데요. 회원 중엔 영국 왕실에서 작위를 받은 진짜 귀족도 있습니다. 공화국 심장부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다소 아이러니하기도 합니다.
주요 클럽별 개요 및 회원 현황 |
▶ ‘혁명’ 이후 생겨난 파리 부촌 귀족클럽=또 아이러니한 게 하나 있습니다. 상류층 전용클럽이 세워진 시기인데요. 모두 역사 속 대표적인 민주화운동으로 기억되는 프랑스대혁명(1789∼1794년)이 끝난 뒤 세워졌습니다.
이 중 ‘누보 세흐클 드 뤼니옹’은 1828년 가장 먼저 설립됐습니다. 혁명으로 쫓겨난 기존 왕실(부르봉 왕가)이 다시 프랑스에 들어와 통치하던 때입니다. 당시 이 나라 선거권자는 전 국민의 0.3%정도였다고 합니다.
이어 1834년엔 ‘조케 클럽’이 생겼습니다. 1830년 ‘7월 혁명’ 4년 뒤인데요. 이때 세워진 입헌군주제 왕정도 전 국민의 0.6%에게만 선거권을 허용했습니다.
이렇게 1940년대까지 비밀사교클럽 9곳이 파리에 생깁니다. 그리고 이는 모두 세느강 서쪽 8ㆍ16ㆍ17구 등지에 자리했습니다. 파리의 대표부촌으로 불리는 곳입니다. 파리를 서울로 놓고 굳이 방향을 따지자면 대략 종로ㆍ성북구 위치 정도가 되겠네요.
특히 ‘파리 16구’에 산다고 말하는 건 스스로 부자임을 드러내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1828년 설립된 누보 세흐클 드 뤼니옹 클럽 |
이들 9대 사교클럽은 적게는 480명, 많게는 2만명까지 회원으로 두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건 이런 ‘이너서클’ 2곳 이상에 속한 회원이 다수 있다는 점입니다. 부유층 가족 전체가 가입할 수 있는 클럽도 있습니다. 이런 클럽 한 곳의 회원이 되기 위해선 가입비와 연회비를 합쳐 1인당 평균 7230유로(한화 900만원)정도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파악된 비용을 합치면 2억7700만유로(3448억원)가량 됩니다. 억만장자들 입장에선 그리 아깝지 않은(?) 수준입니다.
클럽별 회원 수 및 회비현황 |
▶평판 중요…거물급 포진=이너서클에 끼려면 평판또한 중요한 잣대입니다. 사교클럽 9곳 대부분은 ▷기존회원 2명 이상의 추천▷기존회원 전체회의 및 투표 ▷ 클럽 내 구성된 ‘가입위원회’회원의 투표 중 최소 한 가지 이상의 조건을 두고 있습니다.
가입이 까다로운 만큼 ‘아무나’ 회원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닌데요. 예를 들어 ‘폴로 드 파리’란 클럽은 추천을 받더라도 2∼5년 가량 기다려야 회원자격이 주어집니다. 대신 가족 중 한 명이 가입하면 배우자와 21세 미만의 자녀까지 회원이 됩니다. 이곳엔 베르나르 아르노 LVMH(우리에겐 명품 ‘루이뷔통’으로 잘 알려진 곳이죠)회장이 가입돼 있습니다. 아르노 회장의 개인자산은 339억달러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전통의 글로벌 금융가 로스차일드 상속자 중 하나인 에두아르 드 로스차일드도 이 클럽에 속했습니다.
폴로드 파리클럽과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게티이미지) |
2009년 기준 1억3600만달러의 수입을 올린 린제이 오웬 존스 전 로레알 회장도 이곳 회원인데요. 그는 2005년 영국왕실에서 기사작위를 받은 ‘귀족’입니다. 그는 ‘시에클’이란 사교클럽 회원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클럽 ‘티르 오 피종’ 도 회원 2인의 추천과 대기기간 4∼5년을 가입조건으로 내세웁니다. 여기엔 유명 정치인들이 속했는데요. 미테랑 전 대통령 시절 총리를 지낸 에두아르 발라뒤르가 있습니다. 그는 프랑스 우파인 공화국연합당 소속입니다. 발라뒤르 또한 다른 사교클럽에 발을 걸치고 있습니다.기욤 사르코지도 티르 오 피종 소속입니다. 사르코지 전 대통령의 형이죠.
티르 오 피종 클럽과 기욤 사르코지(게티이미지) |
▶평생 이어지는 ‘그들만의’ 인맥=프랑스 사회의 내로라 하는 거물들이 모인 집단인 만큼, 이런 클럽들은 토론이나 스포츠 활동 등을 통해 자신들의 프리미엄(혹은 동류의식)을 키우는 데 힘을 쏟습니다.
1944년에 만들어진 ‘르 시에클’의 경우를 들어볼까요. 우선 클럽의 회원만찬 두 번 중 한 번은 반드시 ‘가치지향적’인 주제로 토론을 벌입니다. 8명으로 구성된 테이블 수장들이 대화를 이끌어간다고 하는데요. 주로 시사현안을 두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회원들은 이 자리에서 최대한 지적으로 보이려 노력한다고 합니다.
이뿐 아닙니다. 테니스나 폴로 등을 즐기는 스포츠모임도 이 클럽의 주요활동 중 하나입니다.
자연스레 회원들의 인맥이 장기간 이어지는데 도움이 되지요. 실제 유년시절 르 시에클에 들어온 한 회원은 “이곳은 ‘세 살 친구가 여든까지 가는’ 유일한 공간”이라며 “대학 이후까지 클럽 인맥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고 하네요.
르 시에클 클럽과 린제이 오웬 존스 전 로레알 회장 (게티이미지) |
▶굳어지는 ‘그들만의 평등’…삼색기 의미는 어디로=외벽이 두터운 이너서클일 수록 ‘울타리 안쪽’ 구성원의 유대감과 평등의식은 강해집니다. 힘들게 벽을 뚫고 들어온 만큼 ‘우리’는 가족같아집니다. 문제는 울타리 바깥입니다. 3년 전 영국 BBC 보도에 따르면 프랑스인 85%는 ‘경제적으로 불공정하다’고 인식했습니다.
지금은 나아졌을까요. 지난달 이 나라는 최악의 테러를 겪었습니다. 일을 저지른 원리주의 무슬림 젊은이들은 한편으론 25%의 실업률을 감내 중입니다. 일자리 구할 확률이 프랑스 사회 평균의 절반 이하인 이들입니다. 전문가들은 민족간 소득격차와 사회적 장벽 등을 이번 테러의 또 다른 원인으로 꼽았습니다. 자유ㆍ평등ㆍ박애의 원리가 모든 시민의 것임을 강조한 프랑스 삼색기의 의미는 적어도 325억원 이상 가진 부자 3345명이 모여사는 파리의 귀족클럽과는 다소 멀어보입니다. 참고로, 지난해 기준 한국 서울에는 재산 300억원 이상 부자 1095명이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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