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 국제문제 전문지인 포린어페어스가 ‘무극(無極) 시대’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해 주목을 끈 적이 있다. 당시 리처드 하스 미국외교협회 회장의 논문을 통해서였다. 세계 질서가 20세기초 다극시대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ㆍ소 양극시대, 1980년대 말 소련 붕괴 이후 미국 중심의 일극시대를 거쳐 이젠 다양한 집단으로 힘이 분산되는 무극시대가 되었다는 주장이었다.
실제 오늘날 세계질서는 몇몇 강대국이 좌우할 수 없다. 시장의 힘이 막강해졌고 글로벌 기업과 금융기관, 각종 국제기구와 비정부기구(NGO), SNS와 언론의 영향력도 커졌다. 시민사회의 발달은 특히 주목할만한 분야다. 지난 1999년 WTO(세계무역기구) 시애틀 각료회의가 글로벌 NGO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이후 각종 국제회의에서 NGO 회의를 별도로 마련한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선진국들은 이제 각종 정책을 마련하고 집행하는 데 있어서도 NGO를 중요한 파트너로 삼고 있다. 한국은 어떤가. 올 들어 한국사회를 격한 소용돌이에 빠뜨린 연말정산 파문의 중심엔 한국납세자연맹이라는 한 시민사회단체가 있었다. 납세자연맹은 2001년 부당한 조세제도를 바꾸고 예산낭비를 견제함으로써 납세자의 권리를 신장하기 위해 조세전문가와 노동운동가들이 구성한 NGO다. 출범 이후 자동차세 불복운동을 시작으로 연말정산에서 누락된 소득공제의 환급신청운동을 10년 이상 전개해왔다. 재산세 부과기준 개선운동, 자영업자 소득세 환급운동, 국민연금 불복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지만 이번 연말정산 파문 만큼 주목받지는 못했다. 연맹은 이번에 ‘증세가 아니다’는 주장의 허구성을 조목조목 파헤치며 정부를 끊임없이 궁지에 몰아넣었다.
납세자운동은 이해관계자가 전국민에 달할 정도로 많지만, 세금구조에 대한 이해가 어렵고 운동의 힘겨움에 비해 각 개인에게 돌아오는 혜택이 적기 때문에 활성화에 어려움이 있다. 이런 점을 노리고 정부도 2013년 세법을 개정하면서 ‘깃털을 뽑듯이’ 조금씩 세금을 더 걷으려고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 연맹이 제시한 현장의 디테일한 사례들이 결국 정부의 무릎을 꿇게 했다.
정부가 현장을 모두 이해하기는 어렵다. 때문에 다양한 모니터링과 조사ㆍ연구를 통해 현장의 목소리를 담으려고 노력한다. 반면에 풀뿌리 정서를 대변하는 시민단체와는 거리를 두어왔다. 특히 이명박 정부 이후엔 이들을 적대시하며 활동에 제약을 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소통을 어렵게 하고 문제를 누적시켜 더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한다.
비록 껄끄럽고 성가시다 하더라도 정책 논의나 입안 과정에서 시민사회단체를 참여시키거나 이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정책에 반영했다면 이번과 같은 사태를 방지하거나 파장을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증세ㆍ복지 논쟁으로 확대된 이번 연말정산 파문은 무극시대에 접어든 오늘날 정부의 거버넌스(governance) 방식에 새로운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해준 선임기자/hj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