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 25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열린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회의가 끝난 뒤였습니다. 저는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당시 삼성그룹 출입기자로서 몇가지 질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취재과열을 막기 위해 구성한 풀기자(Poolㆍ대표기자) 자격이었습니다. 마침 그해는 이건희 회장 취임 20주년이기도 했지요.
먼저 물어본 20년 소감에 이건희 회장은 차분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삼성이) 커져서 좋기는 한데”라면서도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참 고생을 많이 해야 할 위치에 있는 게 우리 한반도”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내가) 창조경영을 말한 것도 이 같은 의미”라고 언급했습니다. 당시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에 대한 언급도 빠질 수 없었지요. ‘언제 경영권을 물려줄 생각이냐’는 직접적인 물음에는 조심스럽게 “자격이 돼야 한다”면서도 “기초는 만들어줘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기자들은 전무로서 조금 더 경영수업을 받아야 하지만, 원칙적으로 경영권 승계 의사를 인정한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최근 재계에선 승계가 화두입니다. 현대차그룹에선 현대글로비스 주식지분 매각이 연초 이슈의 중심에 섰습니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과 정의선 부회장이 보유한 현대글로비스 주식을 매각해 자금을 마련하고, 정 부회장이 이를 바탕으로 현대모비스의 지분을 매입한다는 시나리오로 해석됐지요. 현대차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위치한 현대모비스 지분을 정 부회장이 늘리면서 자연스럽게 승계작업을 이어갈 가능성이 높다는 게 시장의 분석이었습니다. 현대글로비스 주식매각은 불발됐지만, 흐름은 큰 변화가 없어 보입니다.
삼성과 현대차의 경우 이재용 부회장과 정의선 부회장이 그룹 내에서의 위상이 많이 올랐고 이에 맞춰 대내외적으로 활발한 경영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부회장은 이건희 회장의 병중과 중국 휴대폰의 저가공세 속에서도 삼성전자를 무난히 이끌고 있고, 정 부회장도 디자인 경영주도ㆍ친환경차 개발 등 세계 자동차 변화의 흐름에 맞춰 차근차근 일을 해나가고 있다는 평입니다.
최근엔 롯데가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습니다.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차남인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장남인 신동주 전 일본롯데홀딩스 부회장이 맞붙는 형세입니다. 당초 한국과 일본 롯데를 신동빈 회장과 신동주 전 부회장이 각각 자연스럽게 나눠가질 것으로 예상했으나 팽팽했던 균형은 신동빈 회장으로 기우는 분위기입니다. 신 전 부회장이 최근 롯데 주요 계열사 모든 임원직에서 해임되면서지요. 1922년생인 신격호 회장은 93세의 고령에도 여전히 총괄회장으로서 그룹을 진두지휘하고 있습니다. 신 회장이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그룹 후계구도가 확연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모든 슈퍼리치가 그러하듯 그들이 운영하는 기업의 영속성은 아주 중요합니다. 기업이 발을 딛고 있는 나라의 경제와 미래에 대한 걱정도 클 것입니다. 국가부도나 심지어 전쟁 등의 외부변수에 의해 한순간에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 있으니까요. 내부적으로 향후 기업의 미래에 대한 걱정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정말 신뢰할 만한 전문경영인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자녀들을 통해 이를 이어가는 게 일반적입니다. 해외에도 미국 최고의 부자 가문인 월마트의 월튼가나, 화학분야의 명가 듀퐁가 등 대(代)를 이어가는 명문 가문 등이 많습니다. 윗세대 특히 아버지로선 자녀들의 능력과 자질은 물론 본인의 뜻을 잘 따르는지도 볼 것입니다. 자녀들이 아무리 출중하다 하더라도 부족해보일 것입니다. 이때문에 혹독히 단련시키기도 하지요. 재계에선 아버지가 존재하는 한 후계구도를 언급하는 것은 아주 조심스러워합니다. 3, 4세들이 늘 말을 아끼고 조심하는 이유가 바로 이때문입니다. 창업자들이 훌륭히 만들어 놓은 기업을 어떻게 이어가고 번창시켜 나갈지, 최근 재계의 아버지와 아들 앞에 큰 숙제가 놓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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