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전쟁 당사자이자 피해자인 그들의 ‘치킨게임’은 계속될 것인가
[헤럴드경제=슈퍼리치팀 성연진 기자]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 한국 경제의 성장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이 전제는, 석유 기반 산업사회에서 살아남은 스스로를 독려하는 응원구와 같았다. 석유는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꼭 필요한 에너지원이었고, 막대한 자본을 내세워 석유의 생산과 유통, 정제까지 도맡으며 힘을 키워나가는 부호들도 등장했다.
현재 전 세계 석유 산업과 연관된 부호 가운데 빌리어네어는 85명, 그리고 이와 관련된 8개 왕가들의 총자산은 5500억달러로 추산된다. 무려 600조원 가까운 규모다. 한국의 1년 예산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다.
이들 부호의 면면을 살펴보면 석유 산업이 태생부터 ‘자본과 힘에 의한’ 산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작 원유와 무관해보이는 네덜란드 왕가가 세계 메이저 석유회사 가운데 하나인 ‘로열 더치셸’의 지분을 25%나 갖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더치셸은 식민지배하던 네덜란드령 동인도(현 인도네시아)의 유전 개발을 위해 세운 회사였다. 산유국 여부를 떠나 유전 개발과 정제, 유통에 ‘얼마만큼의 자본을 투자할 수 있는가’가 세계의 에너지원 장악을 결정짓게 된 셈이다. 실제 중동 산유국이 모여 만든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이 같은 국제석유자본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최근 OPEC의 헤게모니가 약화될 조짐을 보이면서, 석유 산업은 또 다른 변화를 맞게 됐다. 미국의 대체에너지 셰일가스로 에너지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을 두려워한 OPEC이 공급을 늘려 가격을 낮추는 석유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 왕가가 직접 나서 국제유가의 배럴당 100달러 시대가 끝났다고 종지부를 찍는 것은, 박리다매를 해서라도 석유 기반의 경제활동이 이어지길 바라는 OPEC의 의지를 보여준다.
저유가는 실제 셰일가스 부호들에게 타격을 입혔다. 해롤드 햄 컨티넨탈 리소스 회장은 셰일가스 개발로 지난해 6월 순자산 226억달러까지 올랐지만, 현재 85억달러로 3분의 1 토막이 났다. 때문에 지난해 이혼소송에서는 유가하락으로 인한 재산 감소를 감안해달라고 빌기까지 했다.
유가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정작 ‘석유 부호’ 자신이다.
우선 대규모 자본을 투자했던 오일리치들의 자산 하락이 이어지고 있다. 세계 최대 석유 생산국인 러시아의 투자사 알파(Alfa)그룹 수장 미카일 프리드먼은 지난해 3월 이후 현재까지 순자산이 약 4조원이나 급감했다. 이 기간 176억달러(한화 19조원)이던 그의 자산은 138억달러로 줄었다.
미국 내에서 석유사업으로 가장 많은 부를 축적한 ‘코크 인더스트리’의 찰스 코크와 데이비드 코크 형제도 지난해 2월 494억달러였던 자산이 국제유가의 급락으로 1년 사이 415억달러까지 줄어들었다. 세계 부호 순위도 6위에서 8위로 내려앉았다. 인도 최대 정유회사 릴라이언스의 무케시암바니 회장 등 오너일가 2명의 자산은 초고유가 시절인 2011년에 비해 33%나 줄었다.
미국과 중동 산유국 간의 경쟁이 낳은 ‘저유가’가 이어진다면, 한국의 부호들에게도 득실이 나타날 수 있다. 석유가 전 세계 산업을 움직이는 대표 에너지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특히 중국 부호들의 움직임은 눈여겨볼 만하다. 중국판 포브스인 후룬리포트에 따르면 작년 기준 중국의 에너지ㆍ석유분야 민간부호는 쉐광린(薛光林) 브라이트오일 회장 등 20명, 자산합계는 214억달러였다. 2011년 대비 부호 수는 6명, 자산 합은 279% 늘었다. 유가 하락에도 에너지 석유 부호의 자산이 늘어난 것은, 중국이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인 것과 관련있다는 분석이다.
중국은 최근 국제유가 하락을 전략 비축유의 확충 기회로 판단하고, 전체 원유 수입량을 크게 늘리고 있다. 중국의 원유 수입량은 사상 처음으로 하루 평균 700만 배럴을 돌파했다. 지난해 기준으로도 전체 원유 수입량은 사상 최대인 3억800만t이었다. 중국은 저유가 기조가 내수 위주인 현지 기업 사업성에 도움이 됐다는 분석이다. 이는 원유수입국으로 석유화학제품을 수출하는 한국 부호들도 눈여겨볼 수치다.
영국의 석유회사인 BP(British Petroleum)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원유 소비량은 하루 평균 9130만배럴로, 현재 유가 하락폭인 40~50달러를 대입해 계산하면 최근 6개월 기준 6000억달러에 달한다. 이는 유럽 국가 스웨덴의 국내총생산(GDP)에 해당하는 규모다. 산유국들에겐 한 국가의 1년 총생산만큼의 유동성이 저유가로 사라진 셈이다. 세계 경제가 하나의 유기체가 된 지금, 에너지시장을 움직이는 석유 부호들의 면면을 알아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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