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상에는 며칠 전 먹었던 음식들이 다시 놓여져 있다. 그런데 수저가 몇 벌 더 있다. 그리고 음식들에 붙여져 있던 상표도 온데 간데 없다.
우리네 밥상에 조용하지만 거센 혁명이 불어 닥치고 있다. #1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홀로 인생’의 한 단면이다. ‘간편하게’를 무기로 HMR(간편가정식)은 우리네 밥상에서 주식(主食)이 되고 있다. 하지만 #1과 역설적인 #2 역시 알고 보면 ‘나홀로 인생’에서 파편된 한 조각이다. 지나친 맛 추구(맛집 탐방 트렌드)와 레토르(즉석 식품)에 대한 반발 심리가 아날로그에 대한 추억과 만났다. ‘나홀로’ 외로움에서 파생된 ‘같이’는 SNS와 만나 소셜 다이닝(Social DiningㆍSNS를 통해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 식사를 즐기며 인간관계를 맺음)으로 진화했다. ‘간편하게’와 ‘불편하게’의 미묘한 긴장구도가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밥상을 점령한 HMR…웰빙과 만나다=밥상 혁명의 가장 첫 단면은 ‘간편하게’가 바꿔놓은 HMR의 세상이다. 하지만 과거 ‘3분 카레’와 같은 단순 냉장ㆍ냉동식품이 아니다. 국을 비롯해 탕, 전 등 반찬류로까지 무한 확장을 거듭하고 있는가 하면, 식도락가들 사이에서 지방 맛집으로 소문난 음식점의 레시피까지 인스턴트라는 포장을 입었다. 여기서 한 발 더나가 지난해 한국인의 밥상을 풍미했던 슈퍼푸드까지 올해엔 HMR 대열에 합류할 전망이다.
아워홈 관계자는 “최근 HMR은 맛과 가격이라는 단순한 구매 동인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웰빙으로까지 개념을 확장하고 있다”며 “초기 인스턴트식품에서 출발했던 HMR이 이제는 더 이상 인스턴트 식품이 아닌 주식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업계 한 관계자도 “1인 가구의 지속적인 증가와 ‘함께 대충 먹기’ 보다는 ‘혼자 한끼라도 제대로 먹기’가 확산되면서 진화된 즉석식품군이 등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HMR의 진화와 시장 확대는 단순히 ‘나홀로 인생’ 때문만은 아니다. 소득수준 향상, 라이프스타일의 서구화, 맞벌이 가구의 증가, 가구당 평균 구성원 감소, 노령화 사회라는 한국 사회의 단면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많다.
업계 또 다른 관계자는 “바쁜 현대사회에서 인스턴트나 밖의 음식보다는 간단하지만 건강한 집밥을 찾을 것으로 보인다”며 “이에따라 HMR은 맞벌이 부부 같은 가족단위에서도 수요가 늘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게다가 HMR 시장이 아직까지는 걸음마 단계에 있다는 점과 라이프스타일의 급격한 변화가 맞물려 있다는 점도 HMR 시장에 대한 기대를 낳고 있다. 아워홈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1인당 연간 HMR 소비액은 15.8달러에 불과하다. 영국의 1인당 연간 HMR 소비액은 52.9달러, 스웨덴과 미국, 일본의 경우에도 각각 52.8달러, 48.7달러, 25.5달러에 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나라는 선진국의 3분의1 수준에 불과한 셈이다.
▶HMR, 대형마트 마저 변화시키다=HMR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대형마트의 각개전투도 치열해지고 있다. 대형마트 본사에 식음료 업체에서나 볼 법한 ‘테이스팅 키친’이 들어서는가 하면, 소비자 기호도 조사를 위해 아예 주부 관능평가 패널까지 구성하는 등 무한경쟁 시대를 맞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이마트는 지난해 성수동 본사에 ‘테이스트 기친’을 설치했다. 10평 남짓의 이 공간은 사방 벽면이 흰색으만 칠해져 있어 테이스터가 색깔 영향을 받지 않도록 했으며, 시각과 청각의 방해없이 미각에 집중할 수 있도록 개인적 공간으로 만들어졌다. 이마트는 또 10~15명 규모의 신제품 개발 태스크포스 팀원들이 수요 파악을 위해 거리 설문조사는 물론, 60여명의 주부 관능평가 패널단을 구성해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대구 송림동태탕’을 출시할 당시엔 출시를 한달 가량 앞둔 10월3일, 10일, 17일 3회에 걸쳐 미세한 맛 조정을 위해 미각 테스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마트 관계자는 “레시피를 본래 맛집에서 가져온다 해도 생산 공장에서의 대량 조리 과정과 소비자의 조리 여건 등에 따라 맛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최초 기획한 본래의 맛을 얼만큼 구현하느냐에 촛점을 맞춰 맛 평가를 진행하고 있다”며 “현재는 ‘테이스트 키친’에서 푸딩 신제품 출시를 위해 테이스팅을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불편한’(?) 집 밥, 아날로그와 만나 프리미엄화=HMR이 ‘간편하게’의 화두를 담고 있다면, 집 밥은 역으로 ‘불편하게’라는 화두를 담고 있다. 하지만 집 밥은 단순히 이제 ‘집에서 먹는 밥’이라는 사전적인 정의를 넘어선다. 사회관계학적으로는 SNS(소셜 미디어)와 만나 ‘낯설은 이들과의 관계 형성’이라는 또 다른 화두를 낳고 있고, 여기에 불편을 감수하는 아날로그의 추억까지 겹쳐지면서 ‘집 밥’은 HMR과 함께 밥 상위 혁명을 이끌 전망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가공식품, 특히 편의점 등에서 판매하는 저렴한 가격의 즉석식품에 대한 반작용으로 집에서 먹는 밥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소셜다이닝 문화도 함께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1인 가구의 증가로 인해 인간의 욕구 중 식욕과 사회적 유대 관계에 대한 갈망으로 인해 집밥의 소셜 다이닝이 이슈화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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