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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은 폭력의 세기인가 평화의 시대인가…‘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사이언스북스)

〔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어깨에 화살촉이 박혀 있었고, 손에는 채 낫지 않은 열상이 있었으며, 머리와 가슴에는 흉터가 있었고, 단도에는 다른 사람의 피가 묻어 있었던 5000년전의 인간 ‘아이스맨 외치’(1991년 알프스에서 발견). 둔기로 두개골이 부서졌고, 동아줄에 졸려 목뼈가 불러졌고, 흉기에 목이 잘린 2000년전의 남자 ‘린도맨’(1984년 영국에서 발견). 이렇듯 처참하게 공격당한 시신만을 남겨준 선사시대로부터 우리 인류는 얼마나 멀어져 왔을까?

“서늘한 청동으로 놀랍도록 쉽게 갈라진 인체에서 내용물이 찐득한 격류가 되어 흘러나온다. 파르르 떨리는 창끝에 꿰어 뇌의 일부가 비어지고, 젊은이들은 제 내장을 절박하게 손으로 받치며, 얻어맞거나 도려져 두개골에서 떨어져나온 눈알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주제에 흙바닥에서 껌뻑거린다.”(조너선 갓셜, ‘트로이의 강간’ 중)라고 묘사된 고대 그리스 전쟁. 혹은 ‘너는 이제가서 아말렉을 사정없이 치고, 그들에게 딸린 것을 모두 없애 버려라. 남자와 여자, 아이와 젖먹이, 소와 양, 낙타와 나귀까지 모두 죽여라.”고 하나님이 명하고, 다윗은 ”그곳 사람들을 모조리 데려와 톱으로, 써레로, 도끼로 썰어” 죽인 구약의 시대로부터 인류의 오늘은 도대체 나아지기나 한 것일까?

7천만명이 전장에서 죽은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겪고도 여전히 참수, 무차별폭격, 피의 복수로 얼룩진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분쟁을 목도하고 있는 100년간의 현대사는 인류의 폭력성에 대해서 무엇을 증거하고 있는 것일까?

세계적인 진화 심리학자이자 인지과학자인 하버드 대학 스티븐 핑커 교수의 책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왔는가’(김명남 옮김, 사이언스북스)는 선사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살인과 학살, 전쟁 등 인류 폭력의 역사를 고찰한 책이다. 무려 1408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 스티븐 핑커는 각 시대의 인류가 펼친 참혹한 폭력의 지옥도, 피와 죽음의 스펙터클을 파노라마처럼 펼친다. 당대의 폭력을 나타내는 각종 통계와 숫자의 실증적 자료들은 기둥이 되고, 정치경제사와 인간 심리 및 유전자의 진화, 게임이론은 스티븐 핑커가 세운 이 정교한 이론적 건축물을 완성한다. DNA 수준에서의 생물학으로부터 인류라는 종의 진화, 개인들의 행동 심리, 사회적 상호작용의 모형을 거쳐 실제 1만여년이 넘는 인류의 역사와 사회의 거대한 변화를 추적했다는 점에서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에 필적할만한 성과를 보여준다. ‘총, 균, 쇠’와 함께 사회진화론에 있어 최근 몇 년간중 대중적으로 가장 중요한 저작의 하나로 꼽힐만한다.

민족, 종교간 분쟁과 테러, 무차별 학살과 묻지마 살인의 시대를 사는 독자들은 스티븐 핑커가 안내하는 여행의 입구 위에 “여기로 들어오는 모든 자들은 희망을 버릴지어다”라는 단테가 만난 연옥의 경고문이라도 예감할지 모른다. 그러나 스티븐 핑커의 결론은 묵시록적인 견해를 명쾌하게 뒤집는다. 그는 “9/11 테러, 이라크 전쟁, 다르푸르 분쟁으로 시작된 21세기인 만큼”, “망상과 헛소리의 중간쯤으로 들릴 지 모르지만” 지금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평화로운 세기라고 주장한다. 인류가 인류로서 진화한 이래, 육체와 생명을 훼손하는 살상행위로서의 모든 폭력은 지속적으로 감소해왔다는 것이다. 폭력으로 인한 사망자의 비율이 잠깐 높아졌던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의 미국의 경우와 같이 극히 짧은 시기의 기복은 있지만, 폭력의 감소 추세는 인류 역사의 장기적이고도 단일한 방향이라는 것이다.

그 강력한 증거로 스티븐 핑커가 내세우는 것은 통계다. 고고학 매장지에서 발굴된 것들 중 기원전 1만4000년에서 기원후 1770년까지 존재했던 원시 수렵ㆍ농업 사회의 유골에서 폭력으로 인한 사망자비율은 최고 60%, 평균 14~24.5%였다. 모두 도시와 국가 성립 이전의 사회다. 이어 콜롬버스 상륙 이전의 멕시코 도시와 제국에서는 총 사망자의 5%가 타살이었다. 중앙집권화된 권력(국가)가 들어선 이후에는 대폭 줄어든다. 중근세사에서 가장 폭력적인 종교전쟁이 있었던 17세기 유럽에서는 전체 사망자 중 폭력으로 인한 사망률은 2%,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있었던 20세기 전반부 유럽에선 3%에 불과했다. 20세기 후반부와 미국까지 포함하면현대의 폭력 사망률은 더 낮아진다. 1%정도로 추산된다. 인구 10만명당 전쟁 사망률은 국가 성립 이전 사회(비국가 사회)는 평균 524명으로 전체의 0.5%였다. 19세기 프랑스는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을 치르면서도 평균 연간 10만명당 70명밖에는 잃지 않았다. 2차 대전의 당사자였던 20세기 독일은 인구 10만명당 연간 전쟁 사망률이 144명, 일본이 27명, 러시아가 135명이었다. 20세기의 전쟁광이라는 오명을 얻은 미국은 10만명당 37명이었다.

이러한 폭력의 지속적 감소에 대해 스티븐 핑커는 6가지 경향성이 나타난다고 분석했는데, ▲도시와 정부를 가진 농업 문명으로 전이한 평화화 과정 ▲지역 봉건 권력에서 중앙권력과 상업 하부구조를 갖춘 대규모 왕국이 출현한 중세 후기 문명화 과정▲전제정치, 노예제, 결투, 마녀사냥, 고문 등 야만적인 폭력에 대한 반대가 거세진 이성과 계몽의 시대(인도주의 혁명)▲2차 대전 이후 강대국들간 힘의 균형과 억제로 대규모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긴 평화’ ▲냉전 이후 전세계적으로 내전, 학살, 독재정권의 폭압이 줄어든 새로운 평화▲20세기 중반 이후 여성, 소수자, 동물 등에 대한 폭력을 반대하는 권력 혁명 등이다.

이 책의 백미는 DNA와 진화 과정으로부터 결과한 행동과 심리를 통해 인간에 내재한 폭력성 뿐만 아니라 그것에 반하는 협력과연대의 평화적 본성을 동시에 설명함으로써 폭력의 감소화 추세를 분석한 것이다. 폭력의 본성과 그것에 대립하는 힘들을 다양한 가설과 심리실험으로 보여주는 장(章)들은 하나 하나가 독립된 진화심리학 저서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가장 자주 인용되는 죄수의 딜레마나 밀그램 실험 등 뿐 아니라 인간의 경쟁, 협력, 폭력, 갈등, 거부, 배반 등 심리와 행동을 보여주는 흥미진진한 실험과 가설들이 담겨 있다.

폭력과 협력의 유전자들이 인간의 뇌에서 다양한 화학반응을 이루는 동안 홉스가 리바이어던이라고 부른 중앙집권화된 권력(국가), 상업의 발달, 여권과 여성화된 문화의 발전, 세계주의, 폭력의 순환이 헛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이성의 에스컬레이터 등이 폭력을 감소시키는 외부적인 힘이 됐다.
그렇다면, 이 낙관적인 결론의 의미는 무엇일까? 현실의 미화일까? 스티븐 핑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우리 시대에 남은 폭력을 줄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폭력의 역사적 감소를 깨우치는 것이야말로 그 노력의 가치를 굳게 확신시키는 요소가 아니겠는가?”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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