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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크엔드] ‘보이지 않는 손’ 사외이사
경영진·대주주 견제 취지 불구
거수기·예스맨·보험용 이사…
삐딱한 눈길 쏟아지는 자리

기업 좌우하는 엄연한 이사회 멤버
오너·CEO 독주 제동 역할 막중
경영 혁신 막중한 책임 되새겨야

# 2005년 2월 9일. 미국 휼렛패커드(HP)의 최고경영자(CEO)였던 칼리 피오리나가 회장직에서 경질됐다. 6년 연속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기업가’에 올랐던 그였지만, 컴팩 인수 후 주주들과의 오랜 갈등을 겪은 끝에 결국 자리를 떠나게 됐다.

# 그해 3월 7일. 기술대국 일본의 상징이던 소니는 1946년 창사 이래 처음으로 새 CEO에 영국계 미국인 하워드 스트링거를 임명했다. 전임 이데이 노부유키(出井伸之) 회장과 안도 구니타케(安藤國威) 사장의 동반 퇴임은 경직된 일본 기업문화 혁신의 신호탄으로 해석됐다. 


# 같은 날 미국에선 최대 항공기 생산업체 보잉이 여성 임원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해리 스톤사이퍼 CEO를 경질했다. 스톤사이퍼는 취임 후 2년간 주가를 두 배 끌어올렸지만 스캔들로 회사 이미지를 훼손시켰다는 사유로 결국 낙마했다.

# 며칠 뒤인 3월 13일. 월트디즈니는 1984년부터 21년간 디즈니를 이끌어온 마이클 아이스너의 퇴진을 발표했다. 디즈니의 후손과 경영분쟁을 일으켰고 독선적인 경영을 일삼아 왔단 이유로 임기보다 1년 먼저 내쫓겼다.

# 하루 뒤인 14일. 세계 최대 보험회사 AIG의 CEO인 모리스 그린버그도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무려 40년간 경영을 이어가며 보험업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렸지만 부정회계 등의 혐의로 결국 버텨내지 못했다.

2005년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유명 글로벌 CEO들의 ‘무덤의 해’로 기억된다. 6명의 CEO가 자리에서 물러난 이유는 제각각이었지만 결정적 요인은 하나로 모아진다. 모두 사외이사들의 힘으로 퇴진이 결정됐다는 점이다.

사외이사(社外理事ㆍoutside director)는 말 그대로 회사 소속이 아니면서 경영에 참여하는 사람을 말한다. 외부 인물에게 이사직을 맡기는 이유는 경영진ㆍ대주주의 활동과 결정을 공정한 위치에서 견제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회사에 적(籍)을 둘 경우 필연적으로 ‘오너’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사내이사들이 취지에 맞게만 역할을 해 준다면 제아무리 제왕적 CEO라도 그 앞에선 또 한 명의 이사회 멤버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가 사외이사 제도를 도입한 지 올해로 16년째를 맞았다. 하지만 해외에서 볼 수 있는 사외이사들의 ‘위력’을 그간 찾아 볼 수 없었다. 올해 주주총회도 사외이사들의 이변 없이 조용히 지나가고 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체제 이후 등장한 사외이사 제도는 경영진을 견제한다는 당초 도입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거수기, 방패막이, 고무도장, 손드는 기계, 예스맨, 보험용 이사, 꼭두각시, 연봉자판기, 허수아비, 거마비 수령자, 낙하산 표 등 우리나라에서 사외이사를 비꼬아 칭하는 표현도 다채로울 지경이다.

사외이사의 개입이 과도해 경영에 방해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국내에서는 그 사례를 찾기 힘들 정도다.

우리나라에서 사외이사들이 제대로 된 의견을 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오너와의 학연ㆍ지연ㆍ인맥으로 얽힌 사적관계 때문이다. 사외이사로 선임된 것도 이 관계 때문인데 반대 입장에 서기가 태생적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또 원래 자신의 분야가 아닌 경우가 많다 보니 회사 경영진의 입장을 거스를 만한 전문적인 식견도 갖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사회가 업무집행 기능과 경영진 감독 기능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에도 원인이 있다는 분석이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한국형 사외이사 제도로의 개선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우선 사외이사 선출 시 경영진과의 사적관계를 배제시켜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래야 오너의 ‘입김’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대신 소액주주, 노조 등도 사외이사를 추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는 방안도 제기된다. 사외이사들에게도 연임 횟수를 제한하고 활동에 대한 평가 점수를 매기는 식의 자구노력이 뒤따라야 한다는 주문도 나온다. 경영실패에 대한 책임까지 물을 수 있도록 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제기된다.

백웅기 상명대 금융경제학과 교수는 “사외이사의 반대가 회사 내부의 분란으로 비치고 주가 하락 등 단기적 손실을 우려해 그동안은 사외이사 제도가 유명무실했다”며 “근시안적인 시야를 깨고 이사회의 힘의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인물로 사외이사가 선출돼야 한다”고 말했다. 

서경원 기자/gil@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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