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작가ㆍ연출가가 풀어낸 여성의 생명력=애초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재개관작으로 기획된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이 국립극장 측의 준비 미비로 백성희장민호극장으로 공연장을 바꿔 열린다. 권력 지향적, 수직적 관계 등 남성 이데올로기가 극명한 전쟁터를 배경으로, 권력 다툼에 빠진 남성과 그와 무관하게 삶의 터전을 지킨 화전민 여인네들의 삶을 대조적으로 다뤘다. 가상의 어느 난세에 ‘개국신화’를 창조하려는 도련님은 자신은 여자의 몸이 아닌 나무 열매로 태어났다는 기록을 쓰게하고, 지병을 고치기 위해 갓난아기를 잡아 약으로 해 먹는다. 도련님은 아래로 피를 흘리는 여성 때문에 자신과 병사들이 다 죽는다는 무당의 예언을 믿고 월경하는 여성을 모두 잡아들이라 명하고, 생모까지 죽인다. 살육과 약탈, 권력, 고기 등 남성성은 삶을 파괴하는 이미지로 그려진다. 반면 화전민 여인네들은 군인들에게 씨종자를 나눠주고 밭을 일구는 등 나눔, 임신과 출산, 채소 등 여성성은 전쟁터를 생명의 땅으로 바꿔놓는다.
김지훈 작가는 “권력지향적 이데올로기 중심인 역사관에 모성을 덮고 싶었다. 입체감을 부여하고자 여성성으로서 터부시되고 왠지 모르게 부끄러운 기제가 있는 ‘개짐(생리대)’을 극에 넣었다. 철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월경에 대한 해방감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 작가는 “그동안 전작(‘원전유서’ ‘풍찬노숙’)에선 남성적, 수직적 관계에서 상상력을 찾았다. 앞으로는 일상성, 소시민의 삶, 수평적 관계를 그려보고 싶다”고 했다.
올해 연극계 화제작 ‘이게 아닌데’의 김광보 연출이다. 이호재, 길해연, 오영수, 김재건, 정태화 등 중견배우들이 출연한다.
▶일제시대 위안부의 삶 ‘봉선화’=1980년대 소설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를 쓴 윤정모 작가가 극작을 맡은 ‘봉선화’는 위안부의 삶을 생생하게 풀어낸다. 위안부 할머니, 그의 아들과 손녀 등 3대에 걸친 관계가 그려지면 위안부로서의 고통이 나만의 문제가 아닌, 가족과 사회로 이어져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각인시키는 작품이다.
어머니가 위안부였다는 게 부끄러워 어머니와 결별한 뒤 대학교수가 된 배문하는 딸이 위안부 여성을 주제로 한 논문을 쓰려하자 마뜩치 않아한다. 손녀 딸이 과거를 추적하는 추리식으로 극이 진행된다. 순이의 내래이션으로 소녀 시절, 위안부로 끌려가 고통받던 시절, 종전 뒤 고국으로 돌아온 뒤 가족 간의 불화 등 과거 회상식으로 그려진다.
극 중 실제 위안부 할머니들 증언과 집회, 미국에 세워진 소녀상 등 다큐멘터리 영상과 1939년부터 여성근로 정신대를 모집, 1942년 조선 처녀 수백명으로 구성된 제4차 위안단이 부산항을 출발해 20여명 안팎으로 나눠 일본군 주둔지로 배치돼 정기적으로 보고 등 역사적 사실 내용이 자막으로 삽입된다.
▶삶의 폐부를 찌르는 체홉 작 ‘세자매’ =예술의전당이 2004년 ‘갈매기’ 2008년 ‘갈매기’ 2010년 ‘벚꽃동산’에 이어 선보이는 또 다른 안톤 체호프 작품이다. 차세대 여성 연 문삼화 연출이 맡았다. 여느 체홉 작품처럼 삶이 불만족스럽고 문제 투성이인 인물들이 등장한다. 노처녀인 첫째 올가, 유부녀이지만 불륜에 빠지는 둘째 마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약혼하는 셋째 이리나 등 세자매는 어릴 때 나고 자란 모스크바에서의 삶을 꿈꾸지만, 현실은 늘 이들의 뒷통수를 친다. 원작에 담긴 삶의 모순과 위선, 허무, 불안, 번민, 비극성을 문 연출은 좀 더 가볍고 밝게 그리고자 했다. 문 연출은 “몇년 동안 ‘세자매’를 마음 속에 품었었다. 살아있는 작품을 하고 싶었다. 지루하지 않도록 현재 살아있는 인물로 그리고자 했다”고 말했다. 문 연출은 “체호프 작품이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번역체 때문이다. 이번에 구어체로 바꾸면서 말의 품격은 떨어지지만 대신 인물들이 살아났다. 첫 연습 때부터 ‘우리 살아있읍시다!’ 했다”며 구어체의 말맛 살린 대사와 배우의 생생한 연기력이 다른 체호프 작품과 차별된 점으로 꼽았다. 우미화, 김지원, 장지아, 오민석, 유순철, 임홍식 등이 출연한다.
한지숙 기자/jsha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