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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영란 선임기자의 art & 아트> 같은 공간에 있어도 부재하는 듯한…씁쓸한 ‘부부의 자화상 ’
뉴욕 활동 아티스트 박유아…10월13일까지 옵시스아트 갤러리서 개인전
故 박태준 아버지 타계한지 1년반
매일 커피 들고가 묘소찾는 어머니
생사 상관없이 유지되는, 부부란 이런것
얼굴없는 낯선 채색화엔 깊은 성찰

지난해 다소 과격한 퍼포먼스 논란
누구 딸 아닌 내인생 살고싶은 몸부림


뉴욕에서 작업하는 아티스트 박유아(51)는 포스코를 창업한 박태준 회장의 딸이다. 이화여대 미대ㆍ대학원을 나와 하버드와 콜롬비아대에서 수학한 그는 변호사였던 남편과 이혼하고, 요즘은 두 아이를 키우며 미국서 활동 중이다. 그가 개인전을 위해 잠시 고국을 찾았다.

서울 소격동의 신설화랑 옵시스아트 갤러리(대표 김웅기)에서 ‘오르골이 있는 풍경’이란 타이틀로 작품전(~10월 13일)을 갖는 박유아는 이번에 ‘부부’를 성찰한 25점의 채색화를 내놓았다. 전통종이인 장지에 분채물감을 50여차례 이상 입혀가며 그린 그림엔 부부 초상과 가족의 단란한 일상이 등장한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얼굴이 하얗게 지워져 있다는 점. 저마다의 개성을 드러내는 얼굴과 표정이 뭉개짐으로써 오로지 커플(또는 가족)을 둘러싼 ‘관계’만이 드러난다. 존재하는 듯하나 부재를 암시하는 부부의 초상은 기이하고 낯설다.



-이번 개인전은 부부가 테마다. 그 이유는

▶어머니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타계(2011년 12월)하신 지 1년 반이 넘었는데도 매일 아침이면 현충원으로 아버지를 찾아간다. 생전에 아버지가 좋아하셨던 달달한 다방커피를 가져가 따라드리고 온다. 이런 행동이 혹자에겐 전시용으로 비춰질 듯도 해 “도대체 언제까지 하실 거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3년까진 해야지”라고 하시더라. 그 어머니를 보며 한 사람이 땅 밑에 있든, 침대 옆에서 자고 있든 부부 사이는 여전히 존재하는 것임을 느꼈다.

-박 작가 개인적으론 이혼을 했는데

▶내 자신 실패한 결혼이어서 그 시간을 돌아보며 작업하는 게 무척 괴로웠다. 불효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림 속에서 부부는 우아하게 차려진 테이블 앞에 정답게 앉아 있다. 그러나 실상은 반대일 수도 있을 거다. 지극히 사적인 사진을 작업에 차용한 것은 내 이야기에서 출발하는 게 진정성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관계를 보려면 나의 관계를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박유아 Mr.& Mrs. Koh 장지에 분채, 경면주사, 야교. 100×72cm. 전 남편(고승덕 변호사)과 찍은 사진을 차용한 작업이다 (왼쪽). 박유아 Mr. & Mrs. H. Kim 장지에 분채, 아교. 34×28cm. 2013                                                      [사진제공=옵시스아트]

-작업을 통해 부부란 무엇이라고 느껴졌나

▶무촌이다 보니 굉장히 여러 측면이 있는 듯하다. 더할 나위 없이 밀접한 관계이자, 또 정반대가 되기도 한다. 낯선 남남이 만나 한배를 타고 가는 것은 대단히 모험적인 일이 아닐까?

―그림에 아버지도 등장한다. 생전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나.

▶흔히들 ‘파쇼’로 생각하지만 굉장히 민주적인 분이셨다. 믿기지 않겠지만 한 번도 큰 소리를 내신 적이 없다. 눈물도 많고 정도 많으셨다. 예술가 기질도 많아서 그림도 잘 그리셨다.

―화가 나면 구둣발로 직원들 조인트(정강이뼈의 속어)도 걷어찼다던데….

▶지극히 극단적인 이야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런 분으로 알려져 있는 게 안타깝다. 아마도 그 사람이 미웠다기보다, 나랏돈으로 힘들게 하는 일(포스코)을 대강 하는 것에 화가 나셨을 거다. 아버지의 삶은 첫째도, 둘째도 부강한 국가였으니까.

―동생이 전두환 대통령가로 시집을 갔다. 사돈끼리 인연이 깊었나?

▶아니다. 지금에야 이야기하지만 결혼 얘기가 처음 나왔을 때 아버지가 불같이 화를 내셨다. 중매를 하려던 사람이 한동안 집에 발도 못 붙였다. 하지만 그 시절 정권은 뭐든 한다면 하던 때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막내동생이 전 대통령 차남 재용씨와 결혼했지만 2년 만에 파혼했다. 

고(故)박태준 포스코 전 회장의 딸 박유아. 그는 “부친은 눈물도 많고 정도 많았으며, 그림도 잘 그리셨다”고 회고했다.

-4녀1남 중 아버지를 가장 닮았다고 하더라

▶외모와 성격을 제일 많이 닮았다고들 한다. 아버지도 나를 가장 예뻐하셨다. 약주를 하고 오시면 꼭 나를 깨웠다. 그리곤 옛날 노래를 부르셨다. 그래서 나는 옛 가요를 잘 안다.

―부모로선 어땠나

▶다정다감하셨지만 솔직히 힘들었다. 평생을 ‘내가 국가다’ 하는 마음으로 사셨으니까. 왜 하필 이런 부모 밑에서 태어났나 원망도 많이 했다. 부모는 좀 빈틈이 있어야 자식이 좀 숨을 쉬는데 말이다. 어머니 또한 군기반장이셨다.

―재벌집 딸로 여유롭게 살았을텐데

▶우리 가족은 재벌이 아니다. 아버지도 창업주라곤 하지만 월급 사장이셨고, 포스코 주식을 국민주로 바꿀 때도 ‘한 주도 안 갖겠다’는 원칙을 세우셨다.

-‘박태준의 딸’로 살아가는 게 어떤가.

▶아버지 1주기 추도식을 치르던 날이었다. 아버지가 떠올라 가족들이 눈물을 흘리는데 갑자기 사방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거였다. ‘아, 우리는 마음 편히 울 수도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무척 편안해 보인다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가 이해되는 부분이 점점 많아진다. 바늘 하나 뚫고 들어갈 자리가 없을 정도로 자기관리에 철저하고 엄격하셨지만 자식들을 많이 이해해 주셨다. 허물 많고, 허우적대는 나를 품어주신 분도 아버지다.

-지난해 개인전에서는 요상한 퍼포먼스를 했다. 부모 형제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생고기와 내장을 칼로 썰고 던지며 거울을 깨는 행위예술이었다.

▶당시 퍼포먼스 제목이 ‘효(孝)’였다. 아버지란 존재가 너무 컸기에 부담감 또한 컸다. 이를 오래 담아두면 체증이 될 것같아 작품을 통해 소화하려 했다. 사람들이 규정하는 나를 던져버리고, 새롭게 출발하고 싶었다. 이제 단단한 갑옷에서 나온 기분이다. 부담감을 소화시켜 자양분으로 삼고 싶다. 지하의 아버지도 ‘작가 박유아의 삶’을 응원해 주실 거다. (02)735-1139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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