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의 대규모 양적완화 정책에 힘입어 세계경제를 짓누르던 디플레이션의 먹구름이 다소 걷히고 있는 듯하다. 해외자본이 유입되고 있는 개방 신흥국에서는 주식시장을 중심으로 경기회복에 대한 기대감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작년만 해도 일본식 장기불황과 디플레이션이 우려되던 우리나라의 경제상황도 과연 나아지고 있는 것일까?
부채 디플레이션이란 가계, 기업 등의 부채가 과도한 상황에서 대내외 충격으로 빚 갚을 능력이 저하되면 부채의 감축이 불가피한데, 그 청산과정에서 자산가격과 물가가 하락하여 실질부채부담이 더욱 늘어나고, 가계와 기업의 도산으로 총수요와 총공급이 감소하면서 경기후퇴의 악순환이 초래되는 현상을 말한다. 부채 디플레이션의 가능성을 진단해보기 위해서는 가계 및 기업의 소득과 자산에 대비한 실질부채부담의 변화 추이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주목할 점은 부채가 증가하지 않아도 소득 및 자산가격이 하락하거나, 금융경색으로 화폐유통속도가 감소하여 물가가 하락하고 실질금리가 상승하면 실질부채부담은 늘어난다는 점이다. 일본이 장기 디플레이션의 늪에서 결국 헤어나지 못하고, 급기야 국제사회의 비난을 감수하며 통화, 재정, 환율을 동원한 마지막 카드를 꺼낸 것을 보면 그 국민경제적 고통이 얼마나 큰지 잘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경제의 부채 디플레이션 위험은 어떠한가? 먼저 자산 가격은 부동산시장을 중심으로 뚜렷한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주택 등 부동산가격은 인구구조의 변화에 따른 수요제약으로 이미 장기 둔화국면에 진입한 것으로 보인다. 소득전망 또한 밝지 않다. 빠른 고령화와 낮은 인구증가율로 잠재성장률이 하락하면서 내수침체와 일자리 부족으로 가계의 실질소득 증가 여력은 제한적이다.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이미 작년 11월부터 3개월 연속 1%대로 낮아져 디플레이션 문턱에 도달해 있다. 다만 다행인 것은 아직 신용시장의 위축 조짐은 미미하고, 글로벌 위기 이후 통화유통속도도 회복 추세이며, 실질금리와 실질임금도 안정적이어서 아직 본격적인 부채 디플레이션 국면에 진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그러나 현 상황은 글로벌 유동성의 확대와 이에 따른 자본유입이 우리 경제에 내재된 디플레이션 압력을 완화시킴에 따른 일시적 현상일 수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1990년대 중후반 중남미와 아시아 국가들이 경험한 바와 같이, 부채가 많은 개방 신흥국에서는 자본유입의 급격한 반전이 본격적인 부채 디플레이션을 촉발할 수 있다. 즉 가계와 기업의 부채가 과다한 경우, 총요소 생산성 하락 등의 대내충격이나 국제금리 상승, 교역조건 악화와 같은 대외충격이 자본유출을 촉발하며, 이는 다시 자산 및 담보가치의 하락과 차입제약을 심화시켜 부채 디플레이션을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시스템 내부적으로 누적되고 있는 부채 디플레이션 압력을 최소화하기 위한 선제적인 정책 운용이 긴요하다. 첫째, 가계의 실질부채부담을 낮추어야 한다. 수출에 의존한 성장으로 가계의 부채상환능력을 개선하기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내수 활성화에 역점을 두되 금융권의 수익력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점진적인 채무조정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둘째, 통화당국은 부동산가격과 기대인플레이션 추이, 수요측면의 물가압력 등 디플레이션 지표를 면밀히 모니터링하고, 징후발생시 선제적으로 금리인하 등 리플레이션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셋째, 재정 건전성을 유지하여 국제금융시장의 신뢰를 높임으로써 글로벌 자산재편 과정에서 급격한 자본유출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아울러 환율과 자본흐름의 불안정성 증폭에 대응하여 외환건전성부담금 제도의 실효성을 높이는 등, 거시건전성 정책수단의 보강을 통해 자본유출입의 안정성을 확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