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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을 막 시작하는 그들에겐, 죽음처럼 영원한 사랑이…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사랑을 이루기엔 그들은 너무 어렸다. 서로 달랐던 가문이 두 사람을 갈라놓았고 멀리 떠나고자 했던 계획의 실패, 죽음을 택한 충동적인 결정은 죽어서야 이룰 수 있는 안타까운 사랑으로 미화됐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은 소설, 영화, 연극 등 다양한 장르로 만들어진 세기의 작품이다. 현대로 온 ‘로미오와 줄리엣’엔 마피아가 등장하기도 하고 1940년대 경성이 배경이 되기도 하며 동시대 청소년들의 문제로 부각되기도 하고 심지어 불교문화가 개입하기도 한다.

국립극단이 중국국가화극원 상임연출가 티엔친신과 작업한 ‘로미오와 줄리엣’은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이루지 못할 사랑을 꽃피웠던 이들의 이야기로 변모시킨 작품이다.

1960~70년대 대숙청의 바람이 몰아쳤던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작품의 배경이 됐지만 역사적 배경지식이 없어도 극을 이해하는데 전혀 방해되지 않는다. 다만 마오쩌둥 전기에 나올 법한 대사들이 중국 작가 레이팅의 각색이구나 하고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사진 제공=국립극단]

원작이 가문의 적대성으로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면 티엔친신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념과 사상의 대립이 두 사람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다.

로미오는 홍위병 중에서도 마오쩌둥의 극좌주의를 실현하는 선봉인 공련파의 우두머리.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노동자 계급의 색인 푸른색 의상을 입고 등장한다. 반면 줄리엣은 보수 군부 전사파인 주사단장의 딸. 녹색 군복이 두 계급을 구분짓는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무도회에서 만나는 장면은 판 참모관을 환영하는 무용제로 바뀌었다. 대형 지붕이 위로 열리며 무도회장이 되고 시체 안치소가 되는 것이 인상적이다. 세트 옆에서 슬라이드를 여닫듯 설치되는 무대 왼쪽은 줄리엣의 방, 무대 오른쪽은 뤄선생의 집이다.

둘 사이의 먼 거리를 묘사하듯 두 공간 사이를 차지하는 것은 가파르게 경사진 거대한 지붕 모양의 세트다. 등장인물들의 오르내리는 급격한 감정을 표현하듯 지붕 아래는 감정의 밑바닥, 지붕 위는 최고조에 다다른 감정의 절정을 보는 것 같다.
[사진 제공=국립극단]

로미오가 줄리엣의 방 아래서 달을 원망하며 “아름다운 태양아, 시샘하는 저 달을 없애버려라” 라고 말하는 장면이나, 죽음을 맞이하며 “자 눈아, 마지막으로 봐라. 팔아, 마지막 포옹이다. 생명의 문인 입술아, 당당한 입맞춤으로 도장을 찍어라”라고 부르짖는 장면은 지금으론 어색한 번역투의 대사지만 셰익스피어의 원전이 가진 감성을 잘 살렸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새롭다. 줄리엣은 주씨. 주사단장의 딸이고 로렌스 신부는 뤄선생이다. 몬태규는 로미오의 아버지로 뤄멍타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졌고 파리스 백작은 판 참모관으로, 티볼트는 티에보, 머큐쇼는 마오즈, 심푸는 심슨으로 음을 살린 듯 하다.

각각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기한 강필석, 전미도 두 사람의 호흡은 꽤나 척척 들어맞는다.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에서도 함께 호흡을 맞춘 두 사람은 청춘남녀의 사랑을 너무나 잘 표현한다.

전미도는 서른이란 나이를 잊게 만들 정도로 14세의 철없고 사랑스러운 소녀 줄리엣의 모습 그대로였다. ‘신의 아그네스’, ‘사춘기’, ‘영웅’ 등에서 청순가련, 풋풋한 어린 소녀의 모습을 보여줬던 그는 이번 작품에서도 깜찍한 줄리엣으로 빛났다. 캉화화(유모) 역의 고수희와 뤄선생 역의 김세동도 전형적인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극 중 노래와 음악이 인상적이지만 노래가 대사 전달을 방해하는 점이나 죽음을 맞이하는 결정적인 순간의 짧은 음악이 중국식이란 점은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로미오와 줄리엣의 아름답고 풋풋하지만 죽음으로 영원한 사랑을 이룬 안타까운 스토리는 이 모든 것을 상쇄한다.

사랑을 갈구하는 두 젊은이에게 이념과 사상은 중요치 않았다. 하지만 사랑은 죽어서야 이뤄진다. 마지막 두 사람의 죽음을 추모하며 붉은 천으로 눈을 가리는 모습은 ‘청춘의 눈먼 사랑의 결말은 죽음’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국립극단이 중국국가화극원과 공동제작한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은 오는 29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된다.

문영규 기자/ygmoo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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