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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혜규, 세계현대미술의 심장 ‘카셀’을 쏘다
< 이영란 선임기자의 아트&아트= 카셀 도쿠멘타13 현장탐방기② >

동년배의 한국작가 중 양혜규(41)만큼 국제무대를 왕성하게 누비는 작가도 흔치 않다. 서울대 미대 조소과를 나와 199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미술학교 슈테델슐레를 졸업하고 베를린과 서울을 오가며 작업하는 그는 지난 10년간 숨이 턱에 차도록 세계 곳곳의 미술관과 화랑에서 전시를 펼쳤다 .

중요한 것만 꼽아봐도 네덜란드 유트레히트의 현대미술센터(2006년), 독일 함부르크의 함부르크미술관(2007),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레드캣아트센터(2008), 미국 미네아폴리스의 워커아트센터(2009), 미국 뉴욕의 뉴뮤지엄(2010), 독일 베를린의 바바라 빈 필마 루카치화랑(2010), 오스트리아 브레겐츠의 브레겐츠미술관(2011), 독일 링엔의 링엔 쿤스트할레(2011), 미국 아스펜의 아스펜미술관(2011), 영국 브리스톨의 아놀피니미술관(2011), 미국 뉴욕의 그린 나프탈리 화랑(2012) 등 거개가 쟁쟁한 곳에서의 개인전이다.

금년에도 양혜규는 독일 뤼벡의 오버벡협회에서 리바네 노이앤슈반더와 2인전이 예정돼 있으며, 가을에는 독일 뮌헨미술관의 메인홀에 대규모 설치작품을 선보인다. 물론 독일을 주무대로 활동하는 작가답게 세계적 권위의 현대미술제인 카셀 도쿠멘타(Kassel dOCUMENTA) 13에도 초대받아, 움직이는 설치미술에 새롭게 도전했다. 


양혜규의 신작이 설치된 곳은 카셀 중앙역 뒷편의 을씨년스런 옛 화물역사다. 한 때 나치의 군수물자를 실은 열차가 분주히 오갔으나 지금은 폐허나 진배없는 이 기차역에, 양혜규는 폭 2m의 검은 블라인드 100여개를 도열하듯 늘어뜨렸다.

검은 커텐처럼 낮게 드리워져 정적을 만들어내던 블라인드는 화물차가 기적을 울리며 역사로 들어오듯, 이윽고 ‘착착, 칙칙’ 소리를 내며 차례로 오르내리기 시작한다. 블라인드의 기다란 수평막대 또한 닫혔다, 열렸다를 반복하며 화물역사 저편을 보여주었다가, 잠시 가렸다가를 거듭한다. 마치 잘 짜여진 카드섹션처럼, 아니 열과 오를 맞춰 행진하는 군대처럼 기계적 안무를 반복하는 것이다.

블라인드에 모터를 연결하고, 직접 개발한 소프트웨어로 이를 조정하도록 한 이 키네틱아트(움직이는 미술)의 작품명은 ‘진입:탈 과거시제의 공학적 안무’. 검은 블라인드들이 아귀를 딱딱 맞춰가며 일사불란하게 펼치는 군무는 지난 20세기 세계 전역을 휩쓸던 전체주의를 연상케 한다. 한편의 기하학적 매스게임을 보는 듯한 이 작업을 보고 있노라면 근대화를 기치로 번영을 갈구하며 개인의 자유쯤은 아무 것도 아닌 듯 속박했던 우리 윗세대의 삶과 역사가 저절로 반추된다.

그런데 작품명이 난해하기 짝이 없다. 이에 작가는 “글쎄, 작업이 기계적 안무라 그런가? 좀 어렵게 됐다. 이번 작업을 통해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유토피아를 목표로 ‘더 많이, 더 빨리’를 추구했던 근대의 산업화가 실은 우리 모두 똑같이 경험했던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선진국에선 이미 지나간 일로 치부하는 이 근대화 프로젝트가 아직도 유효한 나라가 많음에 주목하고자 했다”고 답했다. 또 “처음 이 카셀의 화물역사를 찾았을 때 과거 산업적 번영을 누렸던 기차역이 오늘날 초라하게 방치된 걸 보고 ‘찌르르’하고 촉이 왔다. 어쩌면 근대의 산업화는 여전히 현재진행형 시제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고. 우리가 다시금 고민해봐야 할 주제로 다가왔다”고 덧붙였다.

카셀 도쿠멘타의 참여가 확정되고 나서 지난해 3월 캐롤린 크리스토프-바카기에프 총감독이 양혜규를 처음 데려간 곳은 브라이튼이란 지역의 작은 요양소였다. 양혜규는 “수백년 전 천주교 수도원으로 지어졌던 곳이 크리스찬기숙학교를 거쳐 나치시대엔 유대인수용소로 쓰여졌더라. 현재는 정신질환자들을 위한 요양소로 쓰이는 그 수도원에는 묘한 공기가 감돌았다. 시대에 따라 건물의 기능이 바뀌면서 여러가지 것들이 가득 침전돼있는 느낌? 그 날의 경험, 캐롤린이 전해주고 싶어했던 그 메타포가 이번 작업에도 많이 투영됐다”고 밝혔다.

버려진 화물역사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움직이는 미술이 떠올랐고 블라인드를 움직이게 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작가는 “블라인드를 움직이게 하는 모터와 조정시스템을 연결해주는 ‘언어’가 있어야 하는데 그 언어를 개발하는 작업이 쉽지 않았다”고 했다. 결국 조명 분야의 소프트웨어를 가져다 이를 변형하느라 1년여를 기술 스텝과 씨름했고, 마침내 특허를 내도 좋을법한 소프트웨어가 만들어졌다는 것.


한국에서도 그는 2009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대표작가로 참여해 이름이 제법 알려져 있다. “한국에 가면 사람들이 ‘아, 베니스의 그 작가’라고들 알아본다. 작업들도 많이들 이야기한다. 이번에 카셀 도쿠멘타에도 참여했으니 책임감이 더 느껴진다”며 “미술을 취미로 하는 게 아닌 이상, 거의 죽기살기로 해야 한다. 내 스스로에게 관대해지면 바로 그 순간 고꾸라지는 거니까. 무슨 무슨 작가라고 닉네임이 붙는 순간 작가로선 끝나는 거니 그걸 뛰어넘으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매순간 고삐를 단단히 쥐고, 위기의식을 느끼며 작업한다”고 토로했다.

이어 “남들이 어떻게 날 대하고, 어떻게 평가하는지는 두번째 문제다. 제대로 했는지 아닌지, 재탕인지 아닌지는 내 스스로가 가장 잘 알기 때문”이라는 그는 “일관성을 지니면서도 끝없이 변혁을 추구하는 게 가장 큰 숙제”라고 했다.

베니스비엔날레와 카셀 도쿠멘타를 비교해달라고 하자 “베니스는 수만가지 색깔이 꿈틀대면서 아주 내추럴했다면 이곳 카셀은 보다 엄격하다. 내 작업 역시 기계적으로 딱딱 떨어지며, 보다 엄해졌다. 많이 절제를 했는데 그러면서도 파워풀해져야 하니 쉽지 않았다”고 그간의 과정을 들려줬다.

양혜규 스스로 엄격해졌다는 이번 작업은 도시의 독자적 색깔은 희미해지고, 이를 대체할 신(新)산업은 찾지못한채 쓸쓸하게 버려진 카셀의 구(舊) 역사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는 평을 받고 있다. 공영방송 TV채널인 ‘아에르데(ARD)’를 비롯해 각 신문들이 일제히 머릿기사로 보도할 정도로 호평이 이어지는 중이다.

양혜규는 설치작업과는 별도로 공연 연출(스테이징 프로젝트)에도 도전했다. 7일(현지시간) 카셀주립극장에서 프랑스의 지성파 여배우 잔느 발리바를 기용해 연극 ‘죽음에 이르는 병’(마르그리트 뒤라스 원작)을 연출해 올린 것. 원작의 각색과 조명, 영상, 연출, 오브제(대형선풍기) 설치 등을 진두지휘하며 사랑의 불가해성과 유한함을 다룬 이 모노드라마에는 캐롤린 크리스토프-바카기에프 총감독, 유명 아트컬렉터 율리 지그 부부를 비롯해 900여명이 몰려 만원을 이뤘다. 


한국에서도 정형민 국립현대미술관장,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 배순훈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김선정 2012광주비엔날레 커미셔너 등이 공연을 관람했다.

이번으로 뒤라스 소설을 세번째로 무대에 올리는 그는 “배우에 따라, 또 장소에 따라 공연이 확연히 달라지는 건 너무 당연하다. 이번에 함께한 프랑스 여배우 잔느 발리바는 워낙 인격이 독창적이고, 특출해서 좋았다. 머리도 보통 단단한 사람이 아니다"며 "연극을 올리니까 ‘양혜규가 여러 장르를 넘나든다’고들 하는데 솔직히 그런 것엔 전혀 관심 없다. 그저 이 책(뒤라스)에 완전히 꽂혀 이 괴로운 짓을 하고 있다. 원작의 고유성, 절대성이 강하게 다가오니 이를 표현하지 않고 베길 수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캐롤린 크리스토프-바카기에프 총감독은 전세계 기자 500여명이 운집한 카셀 도쿠멘타13 개막 기자회견에서 양혜규 작가를 거론하며 “예술은 파괴된 현장, 버려진 공간을 다시 돌아보게 하고, 동시에 큰 영감을 준다”고 평했다.

프랑스 파리의 손꼽히는 갤러리스트인 샹탈 클루제 씨(샹탈 클루제 화랑 대표)는 “양혜규는 단단한 철학적 기반을 지니고 있고, 한국의 고유한 문화적 요소에 세계의 보편적 요소를 잘 결합해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특별한 작가”라고 평했다. 작품사진=양혜규 스튜디오 제공.


카셀(독일)= 글, 사진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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