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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인희생 담지못한 ‘1965년 체제’ 붕괴…양국관계 새 국면
관동대학살 日정부 법적 책임 명백한 증거
3·1운동 피살자명부도 반인도적 행위 입증

“65년 청구권협정으로 배상책임 소멸”
개인권리 행사 막았던 日주장에 쐐기




한국 정부가 1953년에 전국적으로 조사한 3ㆍ1 운동과 관동대지진 피살자 명부가 사상 처음으로 공개되면서 ‘1965년 체제’가 허물어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식민지 시대 책임 문제는 해결됐다는 ‘1965년 체제’에 중대 허점이 드러난 데다 정부 간 협정에 의해 개인의 권리가 침해될 수 없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가뜩이나 역사 왜곡 문제로 꼬인 한ㆍ일 관계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발견된 ‘일본 대진재 피살자 명부’는 관동대지진 당시, 사망자 중 290명에 대해 ‘피살’ 혹은 ‘일본 헌병에 의해 총살’ 등이 기록하고 있어 일본 정부가 학살의 법적 책임 주체임을 명백하게 밝혀졌다. 그동안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대해 일본 군대와 경찰이 ‘자경단’이라는 이름하에 조직적으로 조선인 사냥에 나섰다는 의혹이 제기돼왔으나 일본 정부는 이를 부인했다. ‘3ㆍ1 운동 시 피살자 명부’ 역시 각각 읍ㆍ면 단위로 총 630명과 성명, 나이, 주소 등 기본 인적 사항 외에도 피해자별로 순국일시ㆍ장소 및 살해된 상황이 기록돼 있어 일본 정부의 반인도적 행위를 낱낱이 밝히고 있다.

그동안 사건과 관련된 구체적인 신원 정보와 피해 정황이 밝혀지지 않아 소송에 나서지 못했던 관련 피해자들은 이 같은 내용을 토대로 일본 정부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에 돌입할 것으로 전망된다.

미쓰비시중공업과 신일본제철에 대한 강제 징용 피해자들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소송에 이어 일제강점기 비인도적 행위에 대한 법적 해결 절차에 돌입하게 되면서 개인 배상 문제가 양국 정부와 민간 기업으로 급속히 확산되는 모양새다.

1962년 11월 일본 도쿄에서 회담을 갖고 있는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왼쪽)과 오히라 마사토시 당시 일본 외무상. 이 자리에서 양측은 무상원조 3억달러 등을 골자로한 ‘김종필-오히라 메모’로 불리는 각서를 교환, 대일청구권문제에 사실상 합의했다. [헤럴드경제 DB]

1965년의 한일청구권 협정은 그동안 일제강점기 폭압정치와 전시 동원에 대한 개인들의 권리 행사를 막아왔다. 지난해 5월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정부 역시 일본 정부와 마찬가지로 “협정에 의해 더이상의 배상 청구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해왔다. 대법원이 “정부 간 재산 및 채권채무관계를 정리한 협정으로 개인의 청구권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는 판결을 내렸지만, 일본 정부는 관련된 협의 요구를 묵살했다.

대일 청구권 협정에 대한 정부 기조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강조한 ‘역사적 책임 배상’에서 ‘경제 발전을 위한 지원 중심’으로 변화됐다. 박정희정부는 한일청구권 협정을 통해 미화 5억달러 규모의 유ㆍ무상의 지원을 받으면서 협정에 의해 대일 청구권이 모두 소멸됐다는 일본의 요구를 들어줬다. 5억달러는 대부분 포항제철 등 기간산업 구축에 사용됐다.

협정 제2조 1항에 대해 피해자단체와 시민사회는 “개인의 권리 침해를 구제해야 할 국가가 오히려 일본의 배상금을 개인에게 돌려주지 않고 경제 개발에 쓴 것은 직무 유기”라며 협정의 실효성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하고 있다.

이 같은 움직임 속에 일본의 반인륜적 범죄가 드러나면서 가뜩이나 꼬인 양국 관계가 개인에 대한 배상 문제로 점점 더 악화될 전망이다. 한 외교전문가는 “개인들이 자기 권리를 찾겠다는 것을 정부가 막을 수 없겠지만 일본 정부와 재계가 배상을 거부할 때마다 여론이 악화되는 점이 정부로선 곤란할 것”이라며 양국 관계가 수렁에 빠질 수 있음을 우려했다. 정부는 일단 정상회담 등 관계 개선을 위한 시도보다는 배상 문제 해결을 위한 외교 교섭을 우선한다는 입장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배상을 위한 교섭을 계속 진행하는 한편, 새롭게 드러난 피살자에 대해서도 배상 청구가 가능한지 검토에 들어갔다.

한편 정부 안팎에서는 “단기간에는 배상 문제로 양국 관계가 더 악화되겠지만 드러난 상처는 치유하고 가야 장기적으로 봤을 때 양국이 미래 지향적인 관계를 회복할 수 있지 않겠느냐”며 비 온 뒤에 땅이 굳듯이 양국 관계가 난관을 극복하길 바라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원호연 기자/why37@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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