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사를 상징하는 법당인 미륵전. 3층 높이의 목조 건물로 장대한 미가 있다. |
사찰에도 봄이 슬며시 다가왔다. 통도사 홍매화인 자장매는 이미 계절의 알림 역할을 다한 듯 만개한지 오래고 화엄사 홍매와 백양사 고불매는 화사함을 뽐내고 있다. 송광사 산수유는 사람맞이 준비를 끝내고 포토존에 줄을 세우고 있고 쌍계사는 벌써 벚꽃축제 채비에 여념없다.
지팡이 고삐 잡고 그윽한 길 따라 / 홀로 배회하며 봄을 맞아 기리네
돌아올 때 소매 가득한 꽃향기에 / 나비가 멀리서 따라오고 있네
1725년 금산사에서 화엄대법회가 열렸다. 거침없는 설법으로 무려 1400명이 몰려든 환성지안(喚醒志安, 1664~1729) 선사의 ‘봄을 읊다’라는 선시(禪時)다.
큰절에는 이야기도 많고 거쳐간 고승들이 많아 고유한 풍이 있다. 금산사도 그렇다.
우리나라 불교를 대표하는 종단인 조계종에는 6대 총림을 포함한 24개 교구 본사가 있다. 백제 법왕 599년에 창건되었고 8세기 진표율사에 의해 미륵성지로 중창된 김제 모악산의 금산사는 전북을 중심으로 61개의 말사를 거느린 조계종 17교구 본사다. 금산사는 보물천지다. 국보 1개와 보물 10개, 그리고 다수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고통과 번뇌에 허덕이는 중생들에게 자비로운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기독교의 메시아처럼 변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대명사가 되고 있는 것이 불교의 ‘미륵신앙’이다. 한국 미륵신앙의 성지라는 모악산 남서부 기슭의 금산사를 다녀왔다. 봄볕에 반짝이는 절 근처 금평 저수지의 윤슬이 아름다웠다.
미륵전과 절 마당. 미륵전은 한국 사찰에서 유일한 3층 법당이다. |
미륵은 남인도에서 오랜 수행으로 도솔천에서 다시 태어난 실존 인물이었다. 석가모니불의 예언에 따라 입적한 뒤 56억7000만 년이 지나 이 세상에 출현해 성불하고 석가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자들을 구제한다고 되어 있다. 세상이 어지럽거나 민중의 고통이 심한 시절엔 구원자의 등장을 바라기 마련이고, 자연스러게 구제불인 미륵신앙이 주목받는다.
금산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미륵전이다. 한국 사찰 중에서는 유일한 3층 법당이다.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조선 인조(1635) 때 다시 지은 뒤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이라는 현판이 각각 걸려 있으나 건물 안쪽은 누각이 아닌 전체가 하나로 터진 통층 구조다. 한국 고건축물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3층 중층 구조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로 지정되었다. 그 안에 모셔진 미륵불상의 크기도 옥내 입불로는 세계 최대다. 삼존불 중 가운데 미륵불상 높이가 11.82m, 좌측과 우측의 상은 8.8m다. 금산사 미륵전은 후삼국시대 후백제의 왕이었던 견훤이 장남 신검에 의해 강제로 감금되었던 비운의 장소로 전래되기도 한다.(일각에선 금산사는 견훤이 중창한 사찰로 감금이 아닌 노후에 기거했다는 설도 있음)
미륵전 안에 있는 미륵불상, 건물 내 입불 기준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
미륵신앙은 6세기 무렵 백제를 중심으로 퍼져나가 부여의 대조사와 논산의 관촉사에도 미륵불이 만들어지고 이후 신라와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백제 유민들의 미륵신앙을 왕실이 흡수했다. 백제 출신 진표율사를 통해 국가사업으로 모악산 금산사, 속리산 법주사, 금강산 발연사에 대규모의 전각과 조형물을 세워 미륵기도 도량으로 삼았다.
고려 후기로 가면서 미륵신앙이 백성들 삶에 뿌리내려 민간신앙과 결합하기도 했다. 금산사 미륵전 수미단 아래에는 커다란 무쇠솥이 숨겨져 있다는 소문 때문에 그에 관련된 신흥종교들이 생겨났다. 증산교(甑山敎)의 창시자 강증산(강일순)은 금산사 근처에서 태어났다. 증산교 신도들은 모악산을 후천세계(後天世界)의 중심지라 믿었다. 증산교도들은 이곳으로 집단 이주해 종교 취락을 이루기도 했다. 대한불교 용화종으로 개명한 용화교 역시 이곳에서 탄생했는데 금산사 바로 근처에 위치한 용화사(성화대)라는 곳이 그 발원지이다. 임진왜란 이후 금산사 미륵전과 풍수지리설 등의 영향으로 모악산 주변에는 소수종교의 미륵신앙 기도처들이 곳곳에 생겨났다.
방등계단(왼쪽)과 오층석탑. 모두 보물로 지정돼 있다. |
금산사엔 귀중한 역사적 흔적이 많다. 미륵전 왼쪽 위엔 사리탑이 있는 송대(松臺)라는 넓은 터가 있다. 그곳의 방등계단(方等戒壇)은 각층마다 부조가 새겨져 있고 다수의 석인상들이 독특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1400여 년 전 진표율사가 설치한 것으로, 이곳에서 출가자와 재가자의 수계(受戒)의식을 했다. 송대에 세워진 오층석탑과 방등계단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금산사는 화엄종 계열의 사찰로 석가모니, 아미타여래, 약사여래 등 모든 부처의 본체이자 진리의 몸이라는 의미의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하는 대적광전(大寂光殿)을 중심 법당으로 구성됐다.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불을 ‘큰 고요함(大寂)과 지혜의 큰 빛(光)을 지닌 부처’라고 설명한다. 대적광전도 한때 보물이었으나 1986년 원인 미상의 불이 나 전소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1990년에 복원한 것이다.
대적광전. 단체 방문객들이 건물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었다. |
금산사의 당간지주 |
현재 대적광전의 ‘다섯 여래상과 여섯 보살상에 대한 개금불사’가 진행 중이다. 돌로 조성된 좌대 위에 돌기둥이 놓여있는 노주, 불상의 좌대일 것으로 보이는 연꽃이 화려하게 새겨진 석련대. 점판암으로 이뤄진 육각다층석탑 등 보물들이 대적광전 앞에 자리하고 있다. 앞마당 한편에는 목탑 형식의 전각인 대장전도 있는데, 역시 보물이다.
금산사 입구 사천왕문 옆에는 절 행사에 사용하는 깃발장대를 지탱하는 두개의 돌기둥(당간지주)가 140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000여 년 전 금산사 주지였던 혜덕왕사의 진응탑비와 고려시대 건립된 금산사 산내 암자인 심원암에 있는 삼층석탑 등도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절 전역이 ‘보물창고’라서 사적지로 지정되었다.
1598년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사찰 전체가 소실되고 이후 중건과 여러 차례 재건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사찰은 1961년 월주스님이 주지로 취임하여 전각들을 신축하고 미륵전과 대적광전, 대장전, 상서전, 금강계단 등은 해체 복원해서 호남의 명찰로 만들었다. 후백제시대에 지어졌으나 이후 허물어진 홍예문도 2010년대에 복원하였다.
금산사 일주문 |
오래된 절인 까닭에 많은 고승들도 이곳과 인연이 있다.
월주스님은 1961년 조계종 본사(本寺) 주지로는 최연소인 26세에 금산사 주지가 되어 현재의 절의 형태를 만들었다. 1980년 제17대 조계종 총무원장에 선출됐으나 군부정권의 ‘10.27 법난’ 때 전두환 지지 성명을 거부했던 이유로 연행돼 고초를 겪고 취임 6개월 만에 총무원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1994년 제28대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복귀한 뒤엔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을 한국 불교계의 시대적 책무로 설정했다. 이후 1990년대 말부터 고(故) 김수환 추기경, 고 강원용 목사와 함께 ‘종교지도자 삼총사’로 불렸고 2021년 7월 금산사에서 입적했다.
1994년 11월 기자회견을 열고 조계종 총무원장 출마를 선언하는 월주스님. 그는 26세 때 금산사 주지를 지냈다. [연합] |
조선시대 때 환성지안선사는 법회를 열면 대중이 모두 기뻐하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법회마다 사람들이 몰렸는데 지금으로 치면 ‘스타 승려’였다. 법회가 거듭되고 영향력이 커지자 조정은 긴장했고 유생들은 경계했다. 숭유억불의 시대였다. 유생들의 모함으로 고초를 당하다가 1729년 유배 간 제주도에서 입적했다. “산이 사흘을 울고, 바닷물이 넘쳐 오른다”는 임종계가 전해진다. 100년이 지나서야 스님의 억울함이 밝혀졌고 해남 대흥사에 비가 세워졌고 제주도에도 순교비가 들어섰다.
백제 영역이던 전북 김제에서 태어난 진표율사는 통일신라시대 대표적인 고승이다. 미륵신앙을 포교하며 신비로운 이적 등을 보여 ‘미륵불의 현신’으로 찬양받았다. 금산사를 중창해 미륵신앙의 중심지로 자리매김시켰다. 매년 이 절에서 계단(戒壇, 계를 주는 법회가 이루어지는 단)을 개설하여 신라불교의 부흥을 이끌었다. 속리산 법주사와 금강산 발연사 등도 창건하여 미륵도량으로 만들고 발연사에서 입적했다.
금산사 입구 기도처에 세워진 불상 |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이루는 김제 만경평야에서 솟아오른 모악산은 예부터 외경의 대상이 되었다. 과거부터 여러 설화가 전래된다.
금산사의 내력을 기록한 금산사지(金山寺誌)에는 ‘엄뫼’와 ‘큰 뫼’라는 말이 등장한다. 모두 높은 산을 의미하는데 후에 엄뫼는 ‘어머니 산’이라는 뜻으로 의역해서 ‘모악’이 되었고, 큰 뫼는 ‘큼’을 음역하고 ‘뫼’는 의역해서 ‘금산(金山)’이 되었다. 구전에 의하면 모악산 꼭대기에서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닮은 큰 바위가 있어 모악산이 되었다고도 한다.
모악산(795m)은 사방으로 흐르는 계곡 덕분에 호남평야를 적셔주는 젖줄 구실을 한다. 기록에 의하면 모악산에는 무려 50여 곳 이상의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금산사, 귀신사(歸信寺), 대원사(大院寺), 청룡사, 용화사, 심원암·청련암 등 많은 고찰과 미륵신앙 기도처가 산재해 있다. 금평저수지를 지나 금산사 쪽에서 접근하는 서쪽 길을 내(內)모악이라 하고 모악산을 오르는 대문으로 통한다.
모악산에 자리잡은 금산사 전경 [금산사홈페이지] |
모악산은 미륵신앙이나 풍수지리설 등의 영향으로 여러 신흥종교의 집회소가 있다. 앞에서 언급한 증산교와 용화교가 대표적이다.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없다’며 왕조시대 혁신적인 사상을 펼치며 난을 일으켰던 정여립의 집과 전봉준의 동학교가 일본군과 혈전을 펼친 귀미란 마을이 모악산 자락에 있다. 1895년 건립된 천주교의 주요 성지인 수류성당도 있고 1905년 미국인 선교사가 건축한, ‘ㄱ자’ 형태의 한옥교회인 금산교회도 가깝다. 금산사 주차장 바로 옆에는 창가학회의 건물도 있다. 이처럼 여러 소수종교가 모여 있는 터전이다 보니 신흥 종교집단에 대한 단속·철거 등이 종종 이루어지기도 한다.
금산사는 전주에서 가깝고 자가용으로 갈 경우, 호남고속도로 금산사IC에서 빠져 10~15분 더 가면 금산사 주차장에 도착한다. 해마다 불교, 개신교, 가톨릭, 천도교, 원불교 등이 모여 종교 간 화합을 위한 걷기 행사를 진행하기도 한다. 금평저수지 인근에는 대형 카페들이 있고 봄철에는 금산사 입구 수천 그루의 벚꽃나무가 화사하게 피어난다.
글·사진 = ㈜헤럴드 정용식 상무
정리 = 박준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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