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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선웅, “연극을 왜 봐야할까…제 답은 좀 궁색해요” [인터뷰]
서울시극단 신임 단장 7개월차
4월 ‘키스’ 시작으로 총 5편 공연
연극성 회복과 인간 본질의 탐구

‘좋은 연극’, ‘관객이 찾는 연극’ 고민
쉽고 재밌는 이야기·모두가 이해할 주제
“잘 만든 작품으로 연극계 사기 진작 바람”
취임 7개월차를 맞은 고선웅 서울시극단 단장은 “올 한 해 라인업의 주제는 연극성 회복을 통해 인간 탐구로 잡았다”고 말했다. 임세준 기자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연극을 왜 봐야하냐고요. 사실 제 답은 좀 궁색해요.”

요즘 고선웅(55)은 ‘연극의 본질’에 대해 자꾸만 되묻는다. 처음 연극을 시작하던 스무 살의 어느날부터 지금까지…. 지난 36년간 끝없이 질문하며 답해온 일을 다시금 반복한다. 지금이야말로 ‘연극성 회복’이 필요한 시대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난 한 해 올라온 연극을 보면 많이 어렵고, 따지고, 분석하는 것들이 많았어요. 조금 더 보편적이고 쉽고, 오락성과 대중성을 가진 작품을 잘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볼 것’들이 넘쳐나는 시대다. 공연장과 공연 예술의 경쟁자는 더이상 극장 안에선 찾을 수 없다. 유튜브의 무한 알고리즘, 넷플릭스를 통해 홍수처럼 쏟아지는 전 세계의 파괴적인 콘텐츠가 ‘무대’를 위협한다. 뭐가 그리 바쁜지, 기어이 ‘밈’(meme)이 된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인 탓에 16부작 드라마도 2시간 요약본으로 보는 때다. 이러한 시대에 “시간과 노동을 투자”해, “온 신경을 집중해 생각하며 보는 장르”인 연극은 점점 소외될 수밖에 없다. 연극은 어쩐지 ‘뒤처진 예술’이 됐다.

“드라마 장르로서의 연극이 영화나 TV가 가진 거대한 파도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 자체로서의 물결은 엄연히 고매한 무엇이 있다고 증명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서울시극단 신임 단장 7개월차. 고선웅 단장의 ‘1년 살림’은 이러한 생각이 바탕이 됐다. 최근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그는 “올 한 해의 주제는 연극성 회복을 통해 인간 탐구로 잡았다”고 말했다.

칠레의 떠오르는 극작가 ‘기예르모 칼데론’의 국내 초연작 ‘키스’ [서울시극단 제공]
“연극 보러 가지 말자는 말 경계”…‘본질의 회복’

지난 9월 취임한 고 단장은 한 해 라인업을 짜기까지 고심을 거듭했다. 고민의 지점엔 큰 틀의 주제와 서울시극단의 단원들이 있었다.

서울시극단은 다섯 명의 중견 배우들이 단원으로 함께 하고 있다. 고 단장은 “극단의 주인은 단원”이라며 “작품을 선정할 때 이 배우들이 최소 세 편 이상 무대에 서는 것을 목표로 라인업을 짰다”고 말했다. 단원들이 골고루 설 수 있는 무대를 만들기 위해 작품은 더욱 신중하게 골랐다. 올해는 총 다섯 개의 연극을 선보인다. 세종문화회관 산하 예술단체 중 가장 많은 숫자다. 내심 “네 편 정도가 적당하다”며 한숨을 쉰다. 그럼에도 “승부의 세계”에 푹 빠진 ‘바둑 마니아’인 고 단장에겐 ‘스릴’과 ‘즐거움’이 함께 하고 있다.

공연계 ‘스타 연출가’의 단장 취임 첫 해이기에 업계의 관심도 상당하다. 첫 작품은 다음 달 막을 올리는 ‘키스’(4월 7일 개막)다. 칠레의 떠오르는 극작가 ‘기예르모 칼데론’의 국내 초연작이다. ‘키스’를 시작으로 시극단은 연극의 본질을 돌아보고, 인간의 층위를 들여다보는 작품을 내놓는다. 퓰리처상 수상자 마샤 노먼의 첫 희곡 ‘겟팅아웃’(6월 23일~7월 9일), 데이트 폭력 시대에 사랑의 본질을 묻는 ‘카르멘’(9월 8일 개막)은 고 단장이 직접 연출한다. 12월 막을 올릴 ‘컬렉션’은 단원 네 명이 캐스팅됐다.

“연극을 하다 보면 지금 시대, 지금 타이밍에는 이런 이야기가 좋겠다 싶은 것, 사람들이 목말라 한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찾아와요. 연극성 회복과 인간 탐구는 ‘리턴 투 이노센스’(Return To Innocence, 순수로의 회귀)와 같아요.”

고선웅 단장은 “연극성을 회복한다는 것은 재밌고 즐거운 것, 그 아래로 의미가 덧대진 것”이라고 했다. “모두가 공감하는 주제”인 ‘인간’을 “재밌게, 그러면서도 쉽게 만드는 것”이 그가 하고 싶은 연극이다. 임세준 기자

고 단장이 그리는 ‘연극의 모습’이 명쾌하다. 가장 기본이 된 것은 ‘재미’다. 그는 “연극성을 회복한다는 것은 재밌고 즐거운 것, 그 아래로 의미가 덧대진 것”이라고 했다. “모두가 공감하는 주제”인 ‘인간’을 “재밌게, 그러면서도 쉽게 만드는 것”이 그가 하고 싶은 연극이다.

“요즘 캐릭터라는 말을 즐겨 써요. 지금은 ‘격변의 시기’잖아요. 음악도 미술도 소설도 지휘도 AI가 할 수 있는 때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XY 염색체를 가지고, 희노애락과 오욕칠정을 느끼면서 살고 있어요. 산업화 시대에서의 문화 지체 현상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어요. 여전히 지체되고 낙오된 인간 자체의 본성을 탐구하고 들여다 보면 좋지 않을까 싶었어요.”

연극은 독특한 매체다. 고 단장은 “연극은 전혀 다른 작품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돼있다”고 말했다. 연극 한 편에 대한 감상이 “연극 전체의 평가를 좌우”한다. 때문에 그는 “연극은 다 좋아야 하고, 좋아지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연극은 어느 극장에서 하든 공연 하나가 재미없고 만족도가 떨어지면, 장르 전체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져요. 게다가 연극 자체를 거부하게 만드는 특이한 속성을 가지고 있죠. 보는 내내 워낙 집중력을 요해서인지, 한 번의 경험이 앞으로의 관극을 결정하는 거예요. 관객들의 ‘다시는 연극 보러 가지 말자’는, 그 말을 조심해야 해요. 그 말이 나오지 않도록 작품을 만들어야 하고, 그래서 모두가 합의해야 해요. 관객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쉬운 주제로 이해가 용이하면서도 감동이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야죠.”

서울시극단 고선웅 단장. 임세준 기자
좋은 연극, 관객이 다시 찾는 연극…‘어떻게’의 고민

‘무엇’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그의 곁을 떠난 적은 없다. 올 한 해 시극단의 신작들은 “인간에 대한 애정, 인류에 대한 사랑의 시선”이 담긴 고전들이다. 검증된 작품을 선택하며 그는 “익숙한 이야기를 또 하는 것이 아니라 잘 만드는 것, 어떻게 잘 표현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했다.

고 단장은 시기마다 한국 공연계에 중요한 점을 찍는 작품을 냈다.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과 같은 인기 연극을 비롯해 창극 ‘귀토’, 뮤지컬 ‘광주’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생명력을 가진’ 작품이 나왔다. ‘광주’는 브로드웨이 무대까지 섰다. 장르를 떠나 연출가 고선웅의 ‘작법’에 대한 답은 많은 작품으로 증명이 됐다. 그의 이야기엔 ‘애이불비’ 정서가 바탕한다. 기쁨, 슬픔 등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감정의 표현이 아닌 오래 묵히고 곱씹은 감정들이 배우의 몸을 통해 툭툭 떨어져 나온다.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우는 것은 관객들이 이미 짐작하고 있는 거예요. 그것을 계속 어긋나게 표현해야죠. 약간의 비틀기가 들어가 관객과의 줄타기를 하는 거예요. 연습할 때도 처음엔 슬픈 장면이니, 배우들이 울도록 둬요. 그렇게 열흘쯤 연습하면 울다 지쳐요. 그 때 물어보죠. ‘이제 그만 울고 싶지 않냐?’ 그러면서 다른 방식을 찾게 되는 거예요.”

그는 “연극은 ‘자연스러움 이후’의 문제”라고 강조한다. ‘생각의 여지’가 많은 장르의 무대에선 자연스러운 모습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오늘도 내일도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면 영상을 찍지 뭐하러 똑같은 것을 반복하냐는 거죠. 그 과정이 반복되면 지치는 거예요. 이런 표현은 좀 민망하지만, 예술적 접근 방법을 통해 표현하는 거죠. 이를 테면 슬픔이라는 1차적인 감정을 예술적 접근을 거쳐 2차적인 예술성을 담보한 감정으로 만드는 거예요.”

서울시극단 고선웅 단장은 “‘저걸 왜 연극으로 만들었을까’ 싶은 작품이 아니라, 극장에서 두 시간을 투자해 볼 수 있는 작품을 만들겠다”고 했다. 임세준 기자

지난 30여년 이어온 성실한 ‘시간의 경험’은 그에게 “쉽고 재밌고 연극”, “관객들이 다시 극장에 올 수 있는 연극”에 대한 답을 찾아줬다.

고 단장은 긴 시간을 돌아보며 “젊을 때엔 내가 하고 싶은 작품을 무대에 올렸는데, 어느 순간 사적인 것이 아닌 공적 테마를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굳이 ‘시간과 돈’을 투자해 “관람이라는 노동력을 제공”한 관객들에게 “개인의 이야기는 스트레스가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렇게 찾아든 주제가 ‘인간’이었다.

“좋은 연극, 나쁜 연극은 관객이 제일 잘 알아요. 좋은 연극을 보고 나면 카타르시스와 전율이 일고, 그 순간 압도돼요.”

그의 목표는 ‘좋은 연극’을 만드는 것이다. “다섯 개의 작품이 시즌마다 가장 재밌는 작품 중 하나가 됐으면 좋겠어요.” 거창할 수도 있고, 소박할 수도 있다. 그는 “‘저걸 왜 연극으로 만들었을까’ 싶은 작품이 아니라, 극장에서 두 시간을 투자해 볼 수 있는 작품이라면 된다”고 했다. 이 목표 안엔 지난 30여년 연극계에 몸담은 그의 바람과 책임감이 담겼다.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코로나19를 겪으며 수십년간 연극을 업으로 삼았던 사람들도 많이 지쳐 있어요. 시극단을 비롯해 연극계 전반의 사기 진작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작품을 통해 관객이 극장으로 돌아오고, 연극인들 스스로도 연극이 이래서 좋은 거구나, 내가 이래서 연극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길 바라는 마음이 있어요.”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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