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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춘향전·흥부전 아니고 레미제라블·노인과바다…‘완전히 다른 판소리’가 온다
소리꾼 이자람 [국립극장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빅토르 위고 ‘레미제라블’,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박서련의 ‘체공녀 강주룡’…. 서점가의 스테디셀러나 세계 고전 리스트가 아니다. 바로 요즘 소리꾼들이 재현해내고 있는 판소리 소재들이다.

새로운 시대의 판소리가 나타났다. 국내 옛 고전 뿐 아니라 이 땅에 살아 숨 쉬는 모든 이야기가 우리 전통의 장단과 운율을 입고 판소리로 재탄생하고 있는 것. 구전으로 전승돼 오던 기존의 판소리 다섯 마당을 뛰어넘어 동서양의 고전부터 익히 알려진 명작을 전통의 그릇 안에 담았다. 낯선 이야기를 품은 판소리는 이제 ‘박제된 유물’이 아닌, 완전히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판소리, 소통하고 진화하는 예술로 진화

창작자들이 경계를 허무는 이유는 한결같다. 이향하 입과손스튜디오 대표는 “판소리가 멈춰있는 공연 예술이 아닌 소통하고 진화하는 예술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동시대의 시각으로 전통을 재해석하고, 전통을 새롭게 보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자람 [국립극장 제공]

소리꾼이자 음악 감독, 작창가이자 연출가, 배우이자 작가인 이자람은 일찌감치 전통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는 지키고 보호받아야 할 소리로 여겨진 전통에 젊은 감각을 매끄럽고 유연하게 더하며 ‘미래의 판소리’를 제시했다. 대표작이 바로 ‘노인과 바다’다.

이자람은 내달 헤밍웨이 소설 ‘노인과 바다’(4월 21~22일, 아트센터인천)로 돌아온다.

‘노인과 바다’는 2019년 11월 두산아트센터에서 초연 이후, 다양한 무대를 통해 꾸준히 살아남았다. 작품은 쿠바의 작은 어촌에 사는 한 노인 어부의 삶을 이야기한다. 어부는 바다 위에서 일 평생 외줄낚시를 하며 대어(大魚)를 잡아왔다. 하지만 운이 다해 걸려드는 고기는 없고, 망망대해에서 길고 긴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무려 89일. 마침내, 커다란 청새치가 미끼를 문다. 작품의 백미는 청새치와 아슬아슬한 낚싯줄을 부여잡고 버티는 노인의 한 판 대결. 부채를 든 이자람과 고수, 오직 두 사람이 무대를 가득 채운다. 이들의 에너지에 비해 무대는 한없이 작아보인다. 누구의 소리도 아닌 오직 이자람이라는 소리꾼의 진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서양 고전·현대 소설·다큐도 판소리 소재
박서련의 ‘체공녀 강주룡’ [판소리공장 바닥소리 제공]

판소리공장 바닥소리는 새로운 시도를 꾸준히 이어가고 있는 단체다. 지난 2002년 결성, 우리 시대의 이야기로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사회적 문제 의식을 판소리에 담았다. 특히 노동 인권을 판소리에 담아낸 점은 그간 본 적 없는 시도다.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와 오늘날의 노동 현실을 담은 다큐 판소리 ‘태일(TALE)’은 이들 단체의 대표작이다.

‘태일’에 이어 제2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박서련의 ‘체공녀 강주룡’(3월 31일~4월 2일, 대학로예술극장)의 이야기도 무대로 가져왔다. ‘체공녀 강주룡’은 독립운동가이자 평양 고무 공장의 여공으로, 대한민국 최초로 고공 농성을 벌인 노동운동가 강주룡이라는 실존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정지혜 바닥소리의 대표는 “우리나라 최초로 고공 투쟁을 벌인 역사 속 인물 ‘강주룡’을 통해 또 한 번 바닥소리만의 방식으로 노동자들의 소리를 세상에 전하고자 한다”며 이번 공연을 제작한 의도를 설명했다. 연출은 이기쁨 창작집단 LAS 대표가, 각색은 연극 ‘우투리: 가공할 만한’의 홍단비 작가가 맡았다.

소리꾼 외의 인물도 등장…형식도 파괴
‘판소리 레미제라블 구구선 사람들’ [두산아트센터 제공]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판소리 레미제라블 구구선 사람들’(4월 8~22일, 두산아트센터)로 다시 태어났다. 판소리 창작 단체 입과손스튜디오의 작업이다. 이들은 원작의 서사와 인물을 바탕으로 쓴 ‘이 시대의 불쌍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입과손스튜디오의 작업은 기존 판소리의 전통을 새롭게 바라보는 것은 물론 형식에서도 변화를 꾀했다. 한 명의 소리꾼과 한 명의 고수가 무대를 채웠던 형태에서 벗어났다.

‘구구선 사람들’은 세 편의 토막소리를 하나로 엮은 완창형 판소리다. 무려 3년의 제작 기간을 거쳐 만들어졌다. 원작에 등장하는 팡틴, 마리우스, 가브로슈의 삶을 각기 다른 형식으로 풀었다. 작품은 ‘세상은 불완전한 한 척의 배’라는 설정에서 시작한다.

입과손스튜디오 관계자는 “언제나 100에 가닿지 못하고 99에 그치고 마는 모자란 세상과 역사 속에서 단 한 번도 사라진 적 없는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 우리의 모습과 닮았다”며 “뭍에서의 안정된 삶을 꿈꾸며 가슴 속에 조그만 혁명의 불씨를 태우는 평범한 사람들의 불쌍한 이야기를 보여주는 무대”라고 말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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