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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럴드광장] 복조리와 조릿대
조현용 경희대 교수

저는 요즘 겨울 산을 다닙니다. 봄, 여름, 가을과는 다른 특별한 맛과 멋이 있습니다. 겨울 산에 오르다보면 다 떨구고 선 나무의 모습에 황량함을 느낍니다.

물론 모든 것을 떨어뜨렸기에 그동안 보지 못했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다 비우고 나면 새롭게 보인다는 게 신기하기도 합니다. 삶의 이치가 그렇겠지요. 겨울 산에서 가끔 모습을 드러내는 소나무나 주목의 푸름이 반갑습니다. 그런데 산을 오르거나 길을 걸으면서 온통 푸른 모습을 만나기도 합니다. 길가가 마치 한여름처럼 푸릅니다. 바로 조릿대입니다. 놀랍게 푸릅니다.

조릿대는 여러해살이식물로 잎이 긴 타원형입니다. 조릿대에 대해서 찾아보면 다양한 이야기가 나옵니다만 아무래도 제 눈을 끄는 것은 줄기는 조리(笊籬)를 만드는 데 쓴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요즘에는 조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작은 삼태기 모양이라고 설명해도 삼태기를 모르겠지요. 조리를 만들 때 쓰는 것이었기에 이름이 조릿대일 겁니다. 조리는 가는 대나무로도 만듭니다만, 이름으로 봐서는 조릿대가 원래 조리의 재료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나무가 나무라면 조릿대는 약간은 풀 같은 느낌입니다.

복조리는 음력 정월 초하룻날 새벽에 부엌이나 안방, 마루 따위의 벽에 걸어 놓는 조리를 의미합니다. 조리는 쌀을 이는 도구이므로 그해의 복을 조리로 일어 얻는다는 뜻에서 걸어 놓는다고 합니다.(표준국어대사전) 예전에는 설날 전날이면 복조리를 사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복조리를 걸어놓은 집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요즘에는 옛날이야기가 되었네요. 집에 복을 불러오는 복조리 문화는 계속 이어나가면 좋겠습니다. 사라진 곳이라면 다시 살리면 좋겠습니다. 아마도 여러분 집에 복이 더 많이 들어올 겁니다.

‘일다’라는 말은 ‘곡식이나 사금 따위를 그릇에 담아 물을 붓고 이리저리 흔들어서 쓸 것과 못 쓸 것을 가려내다’의 의미입니다. 조리가 쌀을 이는 도구이므로 복조리는 복을 건지는 역할을 합니다. 못 쓸 것은 가려서 버리는 것이지요. 우리 삶에는 행복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복조리는 슬픔과 고통과 외로움은 지나가게 하고 행복만을 가둡니다. 늘 행복만 있으면 좋겠지만 인생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옛사람이 조리를 걸어놓고 복을 빌었던 것은 행복을 기억하고 담아두고 싶은 소망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기뻤던 순간은 뜻밖에 쉽게 사라지고 아픔은 사이사이에 걸려 오랫동안 기억이 됩니다. 오히려 복조리와는 반대입니다. 무언가 지날 때마다 건드려지고 상처가 됩니다. 지나간 상처도 되살아나서 아픕니다. 아마 그래서 복조리를 사고 걸어놓을 겁니다. 어쩌면 복조리를 벽에만 거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도 걸어 놓았을 겁니다. 행복한 기억은 남고, 아픈 기억은 스르르 빠져 나가기 바랍니다. 힘든 순간이 오면 집착하지 말고 가만히 손에 힘을 빼고 놓아둡니다. 괴로움이 지나갑니다. 느린 동작 화면처럼 천천히 지나갑니다. 우리는 희미해져 가는 고통의 뒷모습에 씁쓸히 안도합니다.

문득 다른 계절에도 그 자리에 조릿대가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는 조릿대가 있는 줄도 몰랐고 귀한 줄은 더 몰랐습니다. 원래 그 자리에 있었는지도 몰랐던 조릿대가 앙상한 나무 사이에서 더 눈에 띄었듯이, 흰 눈 위에서 더 빛났듯이 힘들수록 주위의 행복을 기억하며 살 수 있기 바랍니다.

저는 겨울 산에서 푸른 조릿대를 만났을 때 복조리가 떠올랐습니다. 아픔은 지나가고 행복은 머무르길 마음속으로 빌었습니다. 올 설에는 복조리를 사야겠습니다. 조금 여유 있게 사서 가까운 이와 나누기도 해야겠습니다. 조릿대를 보면서 겨울도 푸를 수 있다는 것, 눈 위라서 더 푸르다는 것을 기억하며 살고 싶습니다.

bigroot@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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