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선실세가 공무원·공공기관 산하 인사까지 좌지우지
공무원들 “내가 이러려고~” 자괴감에 정체성 혼란
새로운 정책수립 엄두도 못내고 일하는 시늉만…
“공무원들은 원래 영혼이 없잖아요. 위(청와대)에서 큰 방향을 결정하면 공무원들은 그거에 따라서 아이디어를 내고 정책을 만들고 움직일 수밖에 없어요. 공무원들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약해요.”(정부세종청사 고위공무원 A씨)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진행했던 정책조차 게이트에 연루되고 외부 입김이 작용한 것처럼 비춰지는 상황에서 누가 나서려고 하겠습니까. 현 사태가 정리되고 정치상황이 안정될 때까진 (강력한 정책추진을) 기대하기 힘들지 않을까요.”(과장급 공무원)
대통령 탄핵정국 속의 무기력한 공직사회를 대변하듯 희뿌연 안개가 3일 오전 정부세종청사를 둘러싸고 있다. 정부세종청사에는 행정자치부, 외교부 등 6개 부처를 제외하고 18개 정부 부처와 소속기관들이 들어서 있다. [헤럴드경제DB] |
지난해 후반부터 한국사회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공직사회가 속절없이 추락하고 있다. ‘내가 이러려고 공무원이 됐나’라는 자괴감과 소신ㆍ의욕ㆍ책임감을 모두 상실한 ‘3무(無) 신드롬’이 공직사회를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물론, 공직사회의 추락엔 이유가 있다. 박근혜 정부가 의욕을 갖고 추진한 창조경제와 문화융성ㆍ스포츠산업 육성 등이 대통령 비선실세 최순실씨에 의해 좌우되고, 또 이들의 개인적 치부와 영달에 악용된 것으로 드러나면서 많은 공직자들이 ‘정체성의 혼란’에 빠져 있다. 경제활성화를 위해 추진한 규제완화나 사회간접자본(SOC) 투자사업, 대기업 투자대기 프로젝트, 심지어 면세점 추가 허용까지 최순실 게이트와의 연루설에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상황에서 공무원들의 의욕은 바닥으로 추락한 상태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되고 헌법재판소의 최종 심판이 진행되면서 공직사회의 혼란은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 권력이 대통령에 집중돼 있고 청와대 비서실이 거의 모든 국정(國政) 현안과 고위 공무원 및 공공기관ㆍ산하기관의 간부 인사까지 좌지우지하던 상황에서 일종의 ‘아노미(혼돈)’ 상태에 빠진 것이다. 특히 혁신적인 정책이나 새로운 정책, 여러 부처ㆍ집단의 이해가 엇갈린 정책은 수립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기존 정책만 만지작거리며 알맹이 없이 일하는 ‘시늉’만 내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새해들어 공직사회에 자성의 움직임이 뚜렷해지고 있다. 우선 주요 부처 수장들의 신년 각오가 예상보다 강한 톤 일색이다.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정치불안과 경제는 별개”임을, 주형환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올해 수출 5000억달러 회복”을 각각 역설했다.
공직은 5년 단위 정권 체제에서 그나마 국정의 연속성을 유지해 나갈 수 있는 최후의 보루다. 그러하기에 신분을 보장하고 있으며, 공무원에게는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킬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이들의 자괴감과 달리, 공무원들은 결코 약하지 않다.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로 구성된 집단이며, 나라의 운명을 쥐고 흔들 수 있는 강력한 힘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400조원에 달하는 예산에 대한 편성ㆍ집행권을 갖고 있고, 각종 법령과 시행령 등 법안 제출권을 갖고 있다. 행정력에는 사실상 한계가 없다. 예산의 경우 총 400조원 가운데 상당부분이 매년 의무적으로 집행해야 하는 경직성 예산이지만, 단 몇 억원의 지원이 이뤄지기만 해도 해당 산업이나 지역경제의 판도가 달라지는 일들이 수두룩하다.
특히 시장경제의 광포한 공습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는 자영업자들과 중산ㆍ서민층 등은 토착산업을 보호ㆍ육성하면서 성장의 과실이 골고루 퍼질 수 있도록 하는 정부 정책에 목말라하고 있다. 청년층ㆍ실직자들도 실효적인 정부 정책을 고대하고 있다.
공무원이 바로 서야 나라가 살 수 있다. 그 출발은 공무원들이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오로지 국민의 입장에서 정책을 펴는 일이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국민만을 바라보며 정책을 수행할 때 공무원에 대한 신뢰도도 높아질 수 있다. 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국정공백 사태는 공무원 사회가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중대한 계기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이해준 기자/hj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