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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풍터널 내장사와 벽련암, 학명선사의 반농반선 [정용식의 내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④ 전북 정읍 내장사
사찰은 불교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 자원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산에 오르고 절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100곳의 사찰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네 번째 방문지는 전라북도 정읍시에 있는 내장사(內藏寺)입니다. 〈편집자 주〉
내장사 경내. 붉게 물든 단풍나무가 가을정취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1980년, 이미 많은 것을 경험하게 만든 그 시절 대입 예비고사(지금의 수능)를 마친 얼마 후 눈 쌓인 내장산을 올랐다. 교련복 바지, 청바지, 운동화 차림의 60여명은 호랑이 같았던 담임 선생님을 모시고 백양사에서 출발하여 내장사로 넘어갔다. 한때는 절 소유의 농사터였을 넓은 평지와 산골마을 가까이에서 잠시 머물며 일행들은 소주 한잔씩 나눠 마셨다. 뭐라도 잘못하면 따귀를 갈기던 선생님의 솥뚜껑만 하던 손으로 직접 따라준 소주를. 술 한 잔에 담긴 여러 의미는 서로 말하지 않았다. 쓰디쓴 소주 한잔과 함께 내장산의 추억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가진 것이 많고 숨긴 게 많아 내장(內藏)산이라 이름이 붙었던가.

하루 일하지 않았으니 하루 먹지 않을 뿐이네

‘일일부작(一日不作)이면 일일불식(一日不食)한다.’ 일제강점기 한국근대불교 혁신을 위해 힘썼던 학명선사(백학명)는 사원 운영의 원칙을 ‘반농반선’으로 삼았다. 아침에는 학문, 낮에는 노동, 밤에는 좌선이라는 삼단계 수행이었다. “수행자는 농사를 지으면서 참선을 해야한다”며 승려들의 나태함을 꼬집었고 사회적 구제에 힘쓸 것을 당부하며 스스로 호미를 들고 솔선수범했다. 만해 선생은 학명선사에게 퇴락한 내장사의 주지를 맡아 달라는 간곡한 권유를 시로 남겼다.

세상 밖에는 천당이 없고 / 인간 세상에는 지옥이 많다.

장대 끝에 우두커니 섰을 뿐 / 어찌 한걸음 내딛지 않는가?

일에 다다르면 고생이 많고 / 사람을 만나면 이별이 있다.

원래 세상위치 이러하니 / 남아라면 얽매임 없이 멋대로 살리

학명선사는 1923년 내장사 주지를 맡았다. 선농일치(禪農一致) 기치를 걸고 1929년 입적할 때까지 내장사의 기틀을 만들었다. 예전엔 절에서 ‘울력’이라는 이름의 공동작업을 했으나 시대적, 사회적 여건에 따라 승려들의 노동에 대한 입장은 변해온 것 같다. 내장사 연혁 안내판에는 ‘1923년 백학명 선사가 사세를 크게 중흥시킨 뒤…’라는 한마디만 기록돼 있다. 하지만 100년 전 학명선사가 내장사에서 자립경제를 실천했던 소상한 내막과 입적에 관한 여러 기적은 여러 방식으로 전해오고 있다.

원불교의 창시자 ‘소태산’도 내장사에서 학명선사와 함께 선농일치를 통한 종교공동체를 구현하고자 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학명이 열반하면서 그는 원불교를 창시하는 독자적 길을 갔다고 한다. 원불교의 창시 교리엔 학명선사의 생각도 담겨 있을 것이다. 만해 한용운, 소태산, 학명선사의 그림자를 되새기니 내장사를 보는 새로운 눈이 뜨인다.

내장산의 명소 단풍터널. 필자가 방문했을 때 초록색 잎이 많았다.
내장산은 호남의 금강산

내장산은 과거에 영은산(靈隱山)이라고도 불렸다. 내장사의 전신도 백제 무왕(636년) 때 영은대사가 창건한 영은사였다. ‘조선 8경’, ‘호남의 금강산’이란 별칭까지 붙으며 1971년 8번째로 백암산 백양사 지역까지 포함해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풍광을 뽐내지만 그중 압권은 가을 단풍이다. 붉고 노랗고 맑고 고운 단풍은 단연 최고다.

11월 초 단풍 절정기, 전국 각지의 대형버스들이 줄지어 내장산을 넘어 내장사로 향한다. 그러나 올핸 냉온탕을 넘나드는 널뛰기 날씨로 일부 단풍은 일찌감치 겨울나기에 들어갔고, 철 모른 것들은 여전히 푸릇했다. 드문드문 물든 단풍 풍경 앞에서 올해 방문자들은 꽤나 실망한 모양이다.

내장산은 내장사를 중심으로 동쪽으로 주봉인 신선봉(763m)과 장군봉(696m), 연자봉(673m)이 있고 남쪽으로는 연지봉(670m), 까치봉(717m), 망해봉(640m), 서쪽으로는 불출봉(610m), 서래봉(580m) 등 고만고만한 봉우리들이 줄지어 있다. 연지봉에서 발원한 원적계곡과 신선봉에서 발원한 금선계곡이 만나는 지점에 내장사가 있다. 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금선폭포, 용굴 등 비경도 감상할 수 있다. 편하게 내장산을 관망하고 싶다면 연지봉 중턱까지 가는 케이블카를 먼저 탄 뒤 거기서 2km만 더 오르면 신선봉까지 도달한다. 전망대에서 사방을 둘러보고 가파른 800m 산길 구간을 이동해서 내장사로 내려오면 된다.

불에 타고, 다시 짓고
내장사 경내. 대웅전이 불로 소실된 탓에 컨테이너 형태로 임시 대법당을 운영 중이다.

내장사는 천년고찰이지만 국보나 보물 한 점 없다. 지방문화재로 조선 동종과 부도만이 등록되어 있을 뿐이다. 수많은 우리나라 사찰들이 그랬듯 내장사도 다섯 번에 걸쳐 불에 타고 다시 짓고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1539년 중종이 승유억불정책 강화로 승과를 없애고 승려들도 군입대할 대상(軍籍)에 넣도록 하자 호남 승려들이 내장산에 모여 집단 반발했다. 소위 ‘승도탁란(僧徒濁亂)’ 사건이었는데, 이 일이 일어나자 중종은 영은사를 도둑의 소굴이라 하여 사찰 소각령을 내렸다. 1557년에서야 중건하면서 절 이름을 영은사에서 내장사로 바꿨으나 임진왜란과 6·25전란으로 전소된다. 2012년엔 누전으로, 2021년엔 한 스님의 방화로 대웅전마저 전소됐다. 지금은 1000일의 참회와 사죄기도 후 대웅전을 재건하겠다고 임시막사형태의 대법당을 운영하고 있다.

천주교 신자인 정호승 시인이 부처와 관련된 시 ‘산산조각’을 썼다. 시인이 석가 탄생지 룸비니 동산에 놀려갔다가 흙으로 만든 부처를 사왔는데 실수로 떨어뜨려 산산조각이 나자 순간접착제로 붙인다. 그렇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시인에게 부처님이 말씀하신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내장산국립공원의 또다른 명소인 신선제와 우화정

셔틀버스 대신 차분히 걸어가다 보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 아름다운 단풍길과 내장산 국립공원 최고의 명소라는 맑은 연못 신선제(神仙堤)와 그 가운데 솟은 우화정(羽化亭)은 한 폭의 산수화다. 풍광 찍는 사진가들의 사계절 촬영 포인트다.

호남지역 유림들이 벽련암에 모여 서보단(誓報壇)을 세워 항일투쟁 의지를 다진 ‘서보단 사적비’와 ‘조선왕조실록 내장산 이안 사적비’도 길목에 있다. 임진왜란 난리통에서 유일하게 남은 전주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세계기록유산)을 정읍 선비가 내장산 금선계곡 용굴과 은적암으로 이안(移安)하여 지켜냄으로써 역사단절을 막아낸 사적비다.

일주문에서 경내까지 가는 길은 단풍나무로 만들어진 천연터널도 있다. 가을 절정기에는 불국정토(佛國淨土·번뇌의 굴레를 벗어난 세상)에 비유될 정도다. 내장사 단풍터널 숲은 ‘22세기를 위해 보존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산림청 등에서 선정했다는 표지석이 있다.

경내 입구와 정혜루 사이에 조그마한 연못이 있다. 연못 가운데에 작은 불상이 서 있는데 꽤나 운치 있다. 빈번한 화재 예방을 기원하며 연못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으나 화재는 계속되었고 연못엔 저마다의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이 던져놓은 동전들만 쌓여가고 있었다.

절경 벽련암과 청빈 원적암

일주문에서 곧바로 우측으로 900m, 30여 분 정도 올라가면 벽련암이 나온다. 하지만 길이 험한 까닭에 경내 입구에서 원적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자연관찰로를 따라간다. 원적암을 통해 벽련암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경내 입구에서 원적암까지 거리는 1.3km, 원적암에서 벽련암까지는 평지산길로 1.2km, 벽련암에서 일주문까지는 0.9km다. 이 길이 1시간 30분 소요되는 무난한 트래킹 코스다. 원적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불충봉 가는 길목에서 원적암을 만날 수 있다.

청빈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원적암 모습

고려 때 창건했다고 하나 정유재란과 한국전쟁 때 완전 소실된 후 1961년 작은 암자로 복원됐다. 금불상이 서 있는데, 무릎 아래 부분은 금박이 벗겨져 회색빛이 드러내고 있다. 암자 건물 2동은 허름한데, 마치 속세의 모든 것을 거부하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토방 위에 낡은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걸 보고 있으니 어쩐지 속세와 연을 끊은 노승이 볕을 받으려고 우두커니 앉아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길상사 법정 스님 의자가 오버랩되고 밀양 표충사 진불암 담벽에 걸친 지게가 떠오른다. 암자 주인은 누구실까, 궁금해졌다.

원적암에서 벽련암 가는 길은 산길 산책로다. 비자나무숲도 만나고 너덜겅으로 조성된 ‘사랑의 다리’(누가 이름 붙였는지 모르겠다.)도 만나게 된다. 특히 단풍나무 밑에서 자라고 있는 풍성한 조릿대가 발걸음을 편하게 한다. 뒷짐지고 바람소리를 느끼며 걸을 만하다. 이렇게 30여 분 가다보면 서래봉 아래 내장산에서 으뜸가는 풍광을 자랑하는 벽련암이 나온다.

벽련암은 조금 전 보았던 원적암과 비교하기가 민망하다. 이곳은 짜임새 있게 꾸며진 아름다운 암자다. 원래 내장사란 이름으로 일컬었는데 근세에 와서 영은암을 지금의 내장사로 개칭하고 이곳은 백련사로, 그리고 백련암(白蓮庵)으로 강등(?)되었다. 추사 김정희가 이곳에서 수도하면서 백련암(白蓮庵)을 벽련암(碧蓮庵)으로 개칭할 것을 권하고 서액(현판)을 걸었는데 한국전쟁 때 불타버렸다니 안타깝다. 흰 연꽃(白蓮)을 푸른 연꽃(碧蓮)으로 색깔을 바꾸라는 건 어떤 의미였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그림과 같은 기암괴석을 배경을 자리잡은 벽련암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간 전망대에서 내려 보면 기암괴석 서래봉과 그 밑 벽련암 녹차밭, 법당들이 짜임새 있게 자리 잡은 모습이 선명하게 들어온다. 우화정과 함께 내장산의 제1경으로 칭할 만하다.

‘복중의 복은 인연 복’이라는 연못 속에 솟은 바위에 불상이 모든 풍광을 더욱 빛나게 한다. 수령 300년이 넘은 은행나무와 주변을 채우고 있는 오래된 단풍나무들이 어우려져 아름다움을 더한다.

학명선사께선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고 했지만 요즘은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가을 내장산에선 허기질 걱정이 없다. 매표소 입구를 지나면 우화정 근방, 일주문 근방, 케이블카 하층부, 상층부, 전망대, 원적암 가는 길, 벽련암과 일주문 사이 등 곳곳에 먹거리 파는 주막들이 나타난다. 이렇게 많은 주막을 경내에 품고 있는 절도 흔치는 않다. 번데기, 군밤, 술빵, 어묵, 인삼튀김, 파전, 커피, 막걸리까지 고르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가을 내장사엔 몸만 가볍게 가도 눈과 입이 호강할 수 있다. 단, 주머니는 두둑하게.

글·사진=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박준규 기자

ny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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