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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악산 ‘심장’에 자리한 불교성지, 봉정암에 오르다 [내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① 설악산 봉정암(상)
643년(신라 선덕여왕 12) 창건
대표적 한국불교의 성지(聖地)
사찰은 불교라는 종교적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아름다운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관광 소중한 자원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산에 오르고 사찰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전국에서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100곳의 사찰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첫 번째 방문지는 설악산 백담사의 부속암자인 봉정암(鳳頂庵)입니다. 〈편집자 주〉

봉정암 사리탑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설악산 절경
순례길은 재미없는 길?

예수의 열두제자 중 한 분인 ‘성 야곱’의 무덤이 있는 스페인 산티아고로 향하는 800km의 도보길이 있다. 40여일을 걸어가야 하는, 가톨릭교인들에겐 ‘성지 순례길’로 통한다. 동시에 트래킹을 즐기려는 전세계 여행자들이 몰린다. 길을 걸으며 내적인 평화를 갈구하려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종교를 떠나 살아생전 한번은 꼭 가봐야 할 곳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곳이 있다. 진신사리(석가모니의 몸에서 나온 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인 설악산 봉정암 가는 길이다. 홀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순례자의 길’로도 통한다. 혹자는 그곳을 오르는 것 자체가 기도행위라고도 한다. 해발 1708m 설악산의 심장부쯤 되는 1244m 높이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도 살아생전 한번은 꼭 가봐야 할 곳으로 여겨진다.

이런 연유로 필자에게도, 종교적 신념과 별개로, 봉정암 방문이 버킷리스트가 되었다. 봉정암에서 1박하고 대한민국 최고의 비경 설악산 대청봉에 오르는 것. 5~6년 전 무작정 백담사까지 왔다가 시간을 맞추기 어려워 발길을 돌린 기억이 있다. 지난달 말 드디어 봉정암을 올랐다.

순례길을 두고 사람들은 흔히 ‘재미없는 길’이라고들 한다. 말 없이 뻗어있는 길을 한 걸음씩 나아갈 뿐이다. “그저 걷고 또 걷다보니 목적지에 도착해 있더라.” 산티아고길을 다녀온 지인의 설명이다. 봉정암을 가는길도 재미없는 순례의 길일까. 봉정암 등정을 준비하면서 여러가지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왜 다시 봉정암을 오르는가?
백담사 앞 백담계곡. 누가 쌓았는지 알 수 없는 돌탑이 수없이 솟아 있다.

우리나라의 사찰을 그저 승려와 불교신도들이 기도하고 참선하는 공간으로만 정의하기엔 어딘가 부족함이 있다. 저마다의 종교적 신념은 둘째 치고 사찰은 오랜 시간 우리 생활 속에서, 얼과 정신 속에 영향을 주었다. 정신없이 움직이며 쉼 없이 달려오다, 얼마간의 멈춤이 필요할 때 우리는 숲을 찾고 절을 찾는다. 심산유곡에 수행에 적합하도록 건립된 절과 암자는 자연 비경과 어울려 기꺼이 힐링과 안식의 공간이 되어 준다. 산을 좋아하는 우리 민족은 절이 익숙하고 등산길에 잠시 들려 돌탑에 허리를 굽혀 감사기도를 올리는 것도 어색하지 않다. 설악산 봉정암을 처음 오르면서 받은 느낌이고, 또 그곳을 목적지 삼은 이유였다.

백담주차장에서 7km에 이르는 굽이굽이 백담계곡 좁은 길을 따라 마을버스로 20여분 가다보면 천년고찰 백담사가 나온다. 전혀 결이 맞지 않은 두 사람,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 선생과 불교를 탄압했던(1980년의 법난) 전두환 전 대통령이 동시에 떠오르는 곳이다. 백담계곡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절 앞마당 앞 계곡의 수많은 돌탑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시선을 던진다. 수천 개는 족히 돼 보이는 돌탑은 누가 쌓았을까. 해마다 계곡에 큰물이 들어차면 돌탑도 사라질 텐데 누가 다시 저 많은 돌탑을 쌓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내설악 4대 암자를 찾는 불교도들의 불심이 느껴진다.

구름과 맞닿아 있는 설악의 능선들

9월 말 끝물의 초록을 벗고 붉게 물든 10월 말의 설악산을 기대했다. 하지만 설악의 단풍이 완전히 졌음을 백담사 가는 입구에 닿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기온은 봄을 닮았는데 길에 쌓인 낙엽은 스산한 겨울 분위기를 자아냈다. 백담사 앞마당 은행나무는 반 이상 잎이 떨어져 볼품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또한 나름의 순례길에서 마주하는 마음수련의 과정이라고 여겨본다.

‘부처님의 사리 봉안 성지’여서 불자라면 한번쯤 꼭 참배해야 할 곳이라지만 가는 길은 험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암자이기에 내설악 백담사 암릉바위길 10.6km를 5시간가량 올라야 한다. 산행길에 만난 70대 노부부는 벌써 봉정암행이 5번째라고 했다. 6시간 정도 천천히 올라, 암자에서 1박하며 기도하고 다음날 내려온다고 했다. 저 멀리 경상남도에서 찾아온 방문자도 만났다. 무언가를 ‘갈망하는 힘’은 나이나 거리의 벽마저 허무는 듯하다.

설악의 심장, 1244m고지의 봉정암 산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봉정암 가는 계곡길 30리 무릉도원길

신발 끈을 단단히 조이고 백담계곡길을 따라가다 보면 수렴동 계곡이 나온다. 거기엔 영시암이 있다. 잠시 가방을 부리고 앉아 계곡에 울려 퍼지는 목탁소리를 들으며 숨을 고른다.

지금까진 평탄했던 길이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며 조금씩 험해진다. 30여분 더 올라가면 마지막 화장실이 있는 수렴동 대피소가 기다린다. 의자에 잠시 기대니 다람쥐들이 너무 자연스럽게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탐방객들 손길에 익숙해진 모양이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오르막을 준비하라는 듯하다. 여기서 5분여 더 가면 백담사에서 3.5km 지점에 오세암과 봉정암으로 갈리는 갈림길이 나온다. 봉정암까진 7.1km, 오세암은 2.5km 남았단다. 오세암 길은 공룡능선의 출발지인 마등령으로 향하는 길이기도 하다. 오세암에서 봉정암 사이 코스는 매우 어렵다고 이정표에 새겨져 있다.

내설악의 숨막히는 정경
봉정암으로 이어지는 구간 중에 만난 쌍용폭포

봉정암 가는 길은 계속 계곡을 끼고 올라간다. 많은 이들이 다니는 길이라 정비는 잘 되어 있지만 이제부터 길도 좁아지고 조금씩 경사가 가팔라진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 고 했다. 계곡의 물소리는 십리를 뻗어나갈 듯 우렁차고, 여러 폭포와 기암괴석, 그리고 선녀들이 목욕하고 갔을 듯한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수심 깊은 수십곳의 담(潭)과 소(沼)들이 어우러져 있다. 계곡의 물소리와 장단을 맞추며 걷다보면 탄성소리만 연발하게 되어 급경사길의 힘듦도 잊게 된다. 단풍까지 어울렸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마음에서 번진다.

낙차 큰 폭포들도 나타나고 내설악의 진면목으로 통하는 구곡담 계곡에 들어섰다. 굽이굽이 계곡에 9개의 못이 있다 붙여진 곳인데 표지판이 없어 알 순 없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나타나는 폭포들이 만수폭포, 용선폭포, 관음폭포, 쌍용폭포가 있다고 하는데 쌍용폭포 앞에만 이정표와 포토존이 있다. 백담계곡 수렴동 계곡, 구곡담 계곡, 다양한 폭포와 기암괴석, 담소(潭沼)와 어울린 30십리 계곡 풍광이 길 따라 펼쳐진다. 가희 무릉도원길이라 부를 만하다. 여기까지 2시간여 산행길은 비교적 여유를 부릴만하다. 길이를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기나긴 폭포를 따라 길을 오르니 웅장하게 양갈래에서 쏟아지는 쌍용폭포가 포토존과 함께 맞이해 준다. 봉정암까지 1.6km 남았음을 알리는 이정표도 반갑다.

해탈고개를 넘어 문수보살의 사자바위, 그리고 봉정암

쌍용폭포에서 30여분쯤 걸으면 봉정암이 가까워짐을 알리는 봉정교(橋)가 나온다. 눈으로 샘은 보이지 않지만 ‘지혜의 샘’ 표지판도 있다. 지혜를 얻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라는 듯하다.

계곡이 산속으로 완전히 잠겨들 때 쯤 ‘깔딱고개’라 불리는 봉정암코스에서 가장 힘들다는 마의 구간이 나온다. 산행객들이 표지판 아래서 숨을 고른다. 이정표에 ‘해탈(解脫)고개’란 문자가 선명하다. 이제 500m 남았다. 목표지점을 앞둔 상황에서 거만함을 버리고 겸손을 배우라고 하는 걸까. 아님 어린아이의 천진함을 간직하라는 걸까. 두 발과, 두 손을 모두 동원해 올라야 하는 암릉바위의 어려운 구간이다.

해발 1244m에서 내려다본 봉정암 정경
봉정암 법당을 비롯한 암자 건물들. 설악산에 포근하게 안겨있는 형상이다.

‘해탈’이란 ‘번뇌와 집착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 했는데 이 길을 넘으면 번뇌를 벗는 지혜를 얻어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엉뚱한 기대를 하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30여분 구슬땀 흘리며 걷고 나니 봉정암 200m 를 앞두고 해발 1180m 지점에 육중한 사자바위가 나타난다. 큰바위 꼭대기에 사자 한 마리가 자리하고 있다. 부처님의 오른팔이라는 문수보살이 타고 다녔던 그 사자가 아닐까 싶다. 사자를 타고 다니며 오른손에 불칼을 들고 번뇌를 잘라내는 지혜의 상징 문수보살. ‘지혜를 달라’는 마음으로 사자바위를 만지며 둘러보니 설악산의 웅장함이 느껴지는 공룡능성과 용아장성이 좌우에 펼쳐져 있다.

바위에서 대청봉 방향으로 시선을 던지니 멀리 봉정암 법당이 들어온다. 이제 마지막 200m 오르락과 내리락 구간만 남겨줬다. 4시간 30여분을 설악의 풍광에 취해 정신없이 걸은 끝에 마침내 도달했다. 내 마음에 수시로 찾아오는 불청객인 번뇌로부터 해탈을 기대했건만, 돌아온 건 ‘깔딱거림’이었다. 봉정암에 도착하자마자 약수물과 공양간부터 찾게 되었다. (다음회에서 계속)

글·사진=헤럴드 정용식 상무 / 정리=박준규 기자

ny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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