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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탈 상징 ‘정미소’가 시·예술 품으면...
조덕현 작가 개인전 ‘108 and’
108년 된 공장의 과거·현재·미래
지역주민들 생활상 곳곳에 녹여내
김용택 시인 미발표 시도 작품으로
공간성·기억 동시대 눈으로 표현
조덕현, & diary, 2022, copied diary sheets on triangle wood structure, 430 x 800 cm(2 sides), and 430 x 750 cm(one side) [PKM갤러리 제공]
김용택 시인(사진 왼쪽)과 조덕현 작가 . [헤럴드DB 제공]

“정원처럼 가꾸면서 변하는 전시를 하고 싶었다” (조덕현 작가)

“시가 이렇게 생명을 얻을줄 몰랐지...완전 새로 태어났다니까”(김용택 시인)

익산역에서 차로 20분 떨어진 춘포면. 이곳엔 오래된 도정공장(정미소)이 있다. 1914년 춘포일대를 소유했던 일본인 대지주 호소카와 모리다치(1883-1970)가 인근 농토에서 겨둬들인 벼를 쌀로 가공해 일본으로 보내기 위해 세운 곳이다. 이후 정부양곡 도정공장으로 운영되다, 민간 이양을 거쳐 1998년 폐업하게 된다. 건물만 남은 춘포도정공장은 가끔 다크투어를 하는 이들이 찾는 곳이 됐다.

108살 춘포도정공장에 시와 예술이 자리잡았다. 사진같은 사실적 회화로 근현대시간 속 개인의 실존과 운명을 재조명하고, 잊혀진 삶의 기억을 섬세하게 복원해 서사적으로 담아내는 작가 조덕현의 전시가 이곳에서 열린다. 전시 제목인 ‘108 and’는 이 전시가 108년 된 공장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이야기임을 시사한다.

약 700평 규모의 춘포도정공장은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관객을 압도한다. 일제시대 지어진 건물이 내뿜는 아우라는 이곳이 농촌 한 가운데임을 까맣게 잊게 만든다. 정미기계가 있던 공간을 중심으로 양쪽엔 창고공간이 있다. 추수한 벼를 쌓아놓던 공간, 도정한 뒤엔 쌀 가마니를 저장하는 공간으로 사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전시는 건물 전체와 마당공간, 별채에서 이어진다.

전시장 들머리에 놓인 조덕현, & wind.[PKM갤러리 제공]

가장 먼저 관객을 맞이하는 것은 바람에 흔들거리는 얇은 천이다. 선풍기가 꺼짐과 켜짐을 반복하며 바람을 일으키면 천 조각이 너울거린다. 통풍에 특별히 신경써 지었을 건물이다. 나무로 지은 창고방 곳곳에 바람이 통하는 창이 있었다. 작가는 자신이 인식한 바람의 존재를 관객에게도 느껴보라고 제안한다. 옆방에는 거울처럼 작동하는 검은 물 위로 찌그러진 원형의 설치물이 걸렸다. “정미소 기계에서 사용하던 폐 벨트인데, 색만 칠했다”는 작가의 설명이 이어진다.

그 옆방에는 일제 강점기 시절 춘포교회를 배경으로 지역 사람들이 모인 그룹 초상화가 놓였다. ‘108 and’ 전시의 중심 서사인 이춘기(1906-1991)의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아내와 어린아이와 함께 포즈를 취한다. 이춘기는 춘포면 용연리 대장촌에서 태어나 1990년 미국에 떠나기까지 이 지역에서 살았던 인물이다. 일찍 세상을 떠난 아내를 대신 해 다섯 아이를 키우며 과수원을 운영했던 그는 30년 넘는 시간동안 매일 일기를 썼다. 사료적 가치가 인정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소장됐고, 일부는 책으로도 출간됐다.

조덕현, & memoir, 2022, Graphite and charcoal on rice paper, 260 x 588cm [PKM갤러리 제공]

전시는 이춘기의 삶으로 이어진다. 삼각기둥의 거대한 구조물에 그의 일기가 빼곡하게 붙었다. 정갈하고 힘있는 글씨 아래엔 나홀로 양육의 고통과 고민, 하루하루 노동의 고단함과 미래에 대한 불안 그러나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흘러넘친다. 글로 다 할 수 없는 이야기는 그림으로 새겼다. “전시를 준비하며 건물과 ‘밀당’을 하는데, 이춘기를 발견했다. 아니었다면 그저 작품만 전시하는 형태가 되었을 것” 조덕현 작가의 설명이다.

과거의 생생한 서사는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시와 만나 위로받는다. 정미기계가 있던 중간 건물은 시의 공간이다. 조덕현 작가는 김용택 시인의 허락을 받아 미발표 시집 두 권 중 일부를 전시장에 펼쳐냈다. 아크릴판 2~3개를 겹쳐 얇고 고운 폰트로 그의 시를 새겼다. 관객들은 시 앞에 발길을 멈추고 하나 하나 집중해서 읽어야 한다. “우리시대의 시가 이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보려고 해야 보이고, 잡으려 노력해야 잡혀야 한다고요. 애써 찾아야 찾아졌으면 했습니다”

종이 위 텍스트를 벗어난 시는 전시장에서 새로운 얼굴로 독자를 맞이한다. 시원한 웃음으로 만족감을 표시한 김용택 시인은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시를 보여주는데, 완전히 새로 태어난 느낌이었습니다. 정말 감사할 일이죠”라고 말했다. 투명하게 녹아든 시는 관객의 시야를 거스르지 않는다. 기획의도처럼 열심히 찾아야, 보인다. 전시장 바깥 정원 이곳저곳에 놓인 화분도 마찬가지다. 정확하게는 화분이 아니라 ‘시분(詩盆)’이다. 오목한 그릇 바닥에 시가 쓰였다. 보물찾기 하듯 정원을 걷다보면 풀냄새, 바람냄새, 흙 냄새가 섞인다.

어둠과 빛, 바람의 서사는 전시 전체이자 춘포도정공장 그 자체다. 전시는 내년 4월 22일 마친다. 1년을 이어지며 또 다른 주인공을 초대한다. 덕분에 n차 관람객도 많다. 담쟁이 넝쿨이 뻗어오고, 우거지고, 서리를 맞아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봄엔 찬란한 연두빛으로 관객과 마주할 것이다. 작품중 일부는 전북 완주시 오스갤러리에서도 만날 수 있다.

익산=이한빛 기자

vick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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