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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영미 시인의 심플라이프] 폭서에 나의 카페일지

지구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이스탄불행 비행기티켓을 환불하고 국외든, 국내든 어디로도 휴가를 떠나지 않고 내 집, 내 동네에서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 방에 벽걸이 에어컨을 설치했지만 아침과 저녁에 잠깐 돌리고 차가운 바람이 팔뚝에 닿으면 에어컨 전원을 끈다.

느릿느릿 책 읽는 시늉을 하며 야구 경기가 시작되는 저녁을 기다린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 경기에 져도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다. 선수들을 믿지 않는 감독은 우승컵을 들어 올릴 자격이 없다. 선발투수를 너무 빨리 교체한 감독을 원망하다가도 금방 용서한다. 이건 게임이니까, 경기에 졌다고 세상이 달라지거나 내 삶이 변하는 건 아니다. 원고 마감이 닥친 날은 노트북을 들고 집 근처 카페에 간다.

원래 내 집에서 글을 쓰는데 올여름 더위는 견디기 힘들어 카페 창가에 앉아 자판기를 두드린다. 집 근처 카페 서너 곳을 옮겨 다니는데 주인이나 종업원이 너무 젊은 카페는 피한다. 주인이 젊은 A카페는 냉방이 너무 심해 내가 좋아하는 수박주스만 마시고 금방 나온다. 주인이 50대인 B카페는 냉방이 적당하지만 수박주스가 A카페만큼 맛있지 않다. 냉장이 아니라 냉동한 수박을 물과 함께 믹서에 갈아 내놓는데 주스가 어찌나 차가운지 2시간이 지나 노트북 배터리가 바닥 나 경고문이 뜰 때까지 차가움이 식지 않는다. 노트북 배터리가 떨어지기 전에 원고를 마감하려고 바쁘게 손을 놀린다. 예전에는 수필 하나 쓰려면 하루종일 다듬고 고쳤는데 나이가 들면서 글을 쓰는 속도가 빨라졌다.

1인 출판사를 설립한 뒤 오전에 서점 주문을 물류회사에 전달하고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고 점심을 먹은 뒤 오후 2시쯤 글을 쓰기 위해 책상에 앉았는데 요즘은 서점 주문이 뜸해(오늘처럼 한 부도 주문이 오지 않는 날도 있어) 오전시간이 한가해졌다. 주마다 칼럼을 연재하는 C신문사에 얼마 전 실수로 원고를 두 번이나 잘못 보낸 뒤 나는 정신이 맑은 아침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원고를 첨부 안 하고 제목만 달랑 보낸 e-메일을 뒤늦게 확인하고 부랴부랴 서둘러 보낸 원고는 나중에 알고 보니 엉뚱한 원고였다. D잡지사에 이미 보낸 에세이 원고를 C신문사에 주다니! 더워서 내 머리가 어떻게 됐나 보다. 작가 인생 30년 동안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실수를 한 뒤 나는 에어컨을 교체했다. 오전에 원고를 마감하고 오후부터 뒹굴거리는 재미가 쏠쏠 시원하다. 소동파의 말마따나 “남은 인생 밥이나 배부르게 먹으면서/ 동파에서 초연하게 늙어 가리니/ 골짜기 하나만 독차지할 수 있다면/ 그 밖의 세상만사 심드렁할 뿐이다.” (소동파 ‘담이에서 耳’·류종목 옮김)

유배지인 황저우(黃州)에서 살기가 어려워진 소식(蘇軾·소동파의 원래 이름)을 위해 그의 친구가 군청에 부탁해 옛날 군사주둔지였던 땅을 주어 농사 지을 수 있게 했는데 버려진 그 땅이 얼마나 척박했는지 개간하느라 근력이 다 소진되어 시를 지으며 그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비가 동파를 씻어 주니 달빛이 해맑은데/ 도시인들 다 간 뒤에 시골 사람 지나간다/ 울퉁불퉁 돌이 많은 비탈길을 싫어 마라/ 딸그락딸그락 지팡이 끄는 그 소리가 좋단다.”(소식 ‘동파東坡’·류종목 옮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울분을 내려놓고, 비 내린 뒤의 맑은 정취를 노래하는 시골 사람 소동파가 나는 좋다.

시인·이미출판사 대표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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