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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명처럼 접한 톤마이스터…연주자를 빛내주는 직업이죠”문화 플러스
국내 5명 ‘소리의 장인’ 최진 감독에 듣는 희귀 직업세계
최상 음질·연주 이끌어 내는 ‘음반 지휘자’
악기연주·절대청감·소통능력 모두 갖춰야
때론 2000명 청중 몫·심리상담사 역할도
음향 시대따라 변화…매너리즘 ‘경계 1호’
일찌감치 준비해온 ‘3D 음원’ 세계가 깜짝
‘1만 시간의 법칙’ 여기서는 통용되지 않아
‘톤 마이스터’는 까다로운 귀와 따뜻한 소통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세계적인 톤마이스터 최진 감독은 “톤마이스터는 ‘음반의 지휘자’”라고 한다. 임세준 기자

부채꼴 모양으로 자리 잡은 길쭉한 스피커가 스튜디오를 에워쌌다. 그 앞에 놓인 책상 위로 세계적인 톤마이스터 최진 감독의 시간이 흐른다. 그의 손을 거친 내로라하는 음악가들의 음반, 복잡한 음원 주파수로 가득 찬 모니터, 자칫 손을 대면 큰일이 날 것만 같은 디지털 편집기…. 최진 감독의 달력은 쉴 틈이 없다. 그는 한 달 동안 많게는 15개의 음반을 녹음한다. 소프라노 조수미부터 피아니스트 랑랑, 손열음,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에 이르기까지. 지금 현재도 그의 손에서 세계 최고 연주자들의 음악이 만들어진다.

“녹음 현장은 ‘변수의 연속’”이라는데, 최진 감독의 얼굴은 평온하다. 최근 서울 이태원의 음악문화공간 스트라디움에서 만난 최진 감독은 스스로 “스트레스에 강한 사람”이라며 “돌발 상황과 위기가 많으면 즐기나 싶을 정도로 평소보다 녹음이 잘된다”고 말한다. 오랜 시간 단련의 결과다.

‘톤마이스터(tonmeister)’는 우리말로는 ‘소리의 장인’을 의미한다. 이 직업을 가진 사람은 세계적으로도 숫자가 많지 않다. 국내에선 최진 감독을 포함해 다섯 명. 클래식 음반이 본격적으로 산업화를 이룬 1940년대 후반 생겨났으나, 지금도 극소수에 불과한 ‘희귀 직업’이다.

“톤마이스터는 ‘음반의 지휘자’예요. 쉽게 말해 소리도 잘 만들고, 음악도 잘 만드는 두 가지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죠.”

그는 음악과 관련한 모든 일을 관장한다. 연주자의 연주를 정확히 간파하고, 최상의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이를 위해 음악 전공자만큼 악기를 다룰 줄 알아야 하고, 음악 이론부터 악기, 연주의 기술적인 부분과 예술적 부분까지 완벽한 이해를 바탕해야 한다. 현재 국내에선 그가 참여하지 않은 클래식 음반을 찾는 것이 더 빠르다. 백건우·정명훈·정경화·조성진·리처드 용재오닐·임동혁 등 세계 최고의 연주자부터 국내외 유수 오케스트라, 도이치 그라모폰, 데카, EMI, 워너클래식스 등 세계적인 레이블까지 음악계는 언제나 최진 감독을 찾는다. 명실상부 국내 원톱 톤마이스터다.

PD·심리상담·청중…‘천의 얼굴’ 톤마이스터

‘톤 마이스터’는 까다로운 귀와 따뜻한 소통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의 첫 작업은 ‘사운드 체크’부터 시작한다. 악기의 소리를 온전히 담아내기 위해 연주홀이나 녹음실, 연주자의 소리를 확인하는 일이다. ‘밸런스 엔지니어’로의 역할이다. 오케스트라의 녹음엔 보통 30~40개, 최대 50개의 마이크를 설치한다.

“녹음을 시작하기 위해 악기의 소리가 담기는 마이크를 먼저 체크해요. 종종 어떤 마이크가 좋냐는 질문을 받아요. 이건 차로 치면 페라리가 좋냐, 포르쉐가 좋냐는 질문과 같아요. 슈박스 형태인 예술의전당이냐 빈야드 형태인 롯데콘서트홀이냐, 즉 연주홀에 따라 마이크의 종류와 배치도 달라져요. 연주자와 레퍼토리에 따라 적절히 골라 써야 하고요.” 마이크의 위치가 “10㎝만 달라져도 소리는 천차만별”이다. 최진 감독은 “지금은 연주홀에 들어서는 순간, 어떤 소리가 날지 어디에 마이크를 두면 최적일지 한눈에 보인다”고 귀띔했다.

녹음이 시작되면 본격적인 ‘프로듀서로의 작업’이 시작된다. 녹음 현장에서 최 감독은 여러 자아를 가진 얼굴이 된다. 그는 “톤 마이스터의 역할은 그때 그때 다르다”고 했다. 때로는 2000명의 청중이고, 때로는 곁에서 부축하는 한 사람이기도 하다. 연주자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심리 상담사이기도 하고, 그를 꿰뚫어 보는 점쟁이이기도 하다.

“팬데믹 동안 온라인 콘서트를 많이 했잖아요. 연주자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건 청중이 없는 무대예요. 그런데 녹음은 청중이 없는 곳에서 같은 것을 반복하죠. 매번 똑같은 ‘음악적 힘’을 담아 연주하는 것은 쉽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청중 2000명의 역할을 하곤 해요.”

녹음기간은 보통 3~4일. 이 기간 동안 연주자와 톤마이스터는 모든 시간을 공유한다. 녹음 중에는 물론 밥을 먹을 때까지도 “하루종일 붙어 있는다”.

“연주자가 음악에 몰입하고 빠져들 수 있도록 이끌어가는 것이 제 역할이에요. 그들이 모르게, 쉬는 시간에도 식사를 할 때도 이 사람의 감정을 어루만지죠.” 지휘자, 연주자와의 교감을 통해 최상의 음질과 최고의 연주를 끌어내는 것이 톤마이스터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신인 연주자와 거장의 녹음 현장은 많이 달라요. 톤마이스터는 사실 끊임없이 지적하는 사람이에요. 대부분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게 돼죠.” 그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녹음의 결과가 달라진다. 누군가는 상처받고, 누군가는 피드백에 갈증을 느낀다. 최 감독은 때문에 “음악은 기본이고, 연주자의 심리상태까지 잘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신인들의 연주에선 하나부터 열까지 이야기를 하는데, 백건우 선생님과 같은 거장 연주자와 녹음을 진행할 땐 길게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딱 한 수를 두는 거죠.”

이 ‘한 수’를 두기 위해, 연주자의 머릿속과 마음속에 들락거리길 반복한다. 연주자와의 교감을 위한 일이다. “연주자도 프로듀서의 역량과 능력을 순식간에 간파해요.” 최 감독은 “이런 과정을 겪으며 희열을 느낀다”고 말했다. 두 사람, 혹은 여러 사람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가다 보면 어는 순간 “불꽃이 튀고, 반짝거리며 터지는 순간”을 만난다. “음악이 위대하는 것, 사람이 위대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과정이에요.”

음악의 변화·기술의 발전…3D 음원 시대 예견

음악은 영원해도, 음향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음악과 기술이 만나는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과도기를 마주한다. 톤마이스터는 그렇기에 진화하는 직업이다.

최진 감독은 “꾸준히 공부해야 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배워야 한다”며 “톤마이스터는 매너리즘에 빠지는 순간 무너지는 직업”이라고 했다.

미래를 위한 준비도 일찌감치 시작됐다. 그는 오래 전부터 “3D 사운드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견, 2017년부터 독일 정부 산하 연구기관 프라운호퍼 연구소(Fraunhofer Institut)와 함께 3D 음향 표준화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프라운호퍼 3D 스튜디오는 돌비 애트모스·AURO 3D·22.2 채널 등 현존하는 모든 3D 음향 시스템을 망라하는 ‘3D 사운드의 중심지’이다.

당시 한국에선 세계 최초로 4K UHD 방송이 시작하며 3D 사운드 분야가 주목받았지만, 정작 반향은 없었다. 도리어 회의적이었다. 방송가에선 관련 장비도 없었고, 오디오 시장에선 수요가 없었다. “3D 사운드가 아무리 좋다 한들 시장에서 받아내지 못하는 기술은 구현되기 힘들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그의 예견은 현실이 됐다. 지난해 애플뮤직이 뛰어들며 3D 사운드는 오디오 업계의 미래로 떠올랐다. 방탄소년단(BTS)의 글로벌 히트곡인 ‘버터(Butter)’, ‘퍼미션 투 댄스(Permission to Dance)’도 3D 음원으로 서비스 중이다.

“기술의 발달로 음원도 충분한 공간감을 느끼는, 손에 잡히는 사운드로 들을 수 있는 시대가 온 거예요.” 최 감독은 2018년 3D 입체 음향 스트리밍을 위한 녹음을 일찌감치 진행했다. 지휘자 안드리스 넬손스,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함께 번스타인의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를 작업했다. 지난해 애플뮤직이 3D 음원을 론칭한 이후 최 감독이 작업해둔 국내 연주자들의 클래식 음원이 줄줄이 공개돼 세계 시장을 놀라게 했다.

그는 “20년 전과 달리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사운드에 관심이 높아져 신기하고 재밌다”고 했다. “이태원의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엔 20대 MZ세대들이 LP를 들으려고 30분씩 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어요. 이렇게 음악과 소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 정말 흥미롭더라고요.”

고가의 헤드폰과 오디오 시대가 도래했고, 명품 카오디오가 각광받을 만큼 소리에 대한 관심도가 달라졌다. 변화하는 흐름을 체감하는 그는 다시 첫 단추를 잘 채우는 일로 돌아간다. “녹음의 시작은 최적의 장소를 찾는 일”이다. 좋은 연주홀, 좋은 스튜디오는 좋은 음반을 만드는 첫 걸음이기도 하다.

최 감독은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빈야드홀이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지만, 국내에도 다양한 형태의 콘서트홀이 생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빈야드홀 형태의 콘서트홀은 어느 객석에서나 동등한 사운드, 동등한 시야를 확보한다는 이상적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그 이상을 채우기는 쉽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다.

“어느 한 방향으로 치우치기 보단 전통적인 슈박스형 공연장부터 빈야드까지 다양한 형태의 콘서트홀이 만들어져야 보다 다채로운 소리의 시대를 열 수 있어요. 그러한 다양성이 문화의 힘을 키우는 기본이기도 하고요.”

톤마이스터는 연주자 더 빛내 주는 직업

최 감독이 톤마이스터로 접어든 것은 어쩌면 운명이고 숙명이었다. 그는 서울대 음대에서 호른을 전공하다 20대 중반 독일로 향했다. 독일 뒤셀도르프 로베르트 슈만 국립음대에서 사운드&비주얼 엔지니어링을 공부하며 ‘소리 장인’의 길로 접어들게 됐다.

“원래는 지휘자가 되고 싶었어요. 음악의 전체를 아우르는 사람이 되고 싶었죠.” 직업은 다르지만, 역할은 비슷하다. 톤마이스터로 발길이 이동한 것은 ‘환경의 영향’이 컸다.

“뱃속부터 음악을 들어왔고”, “좋은 오디오와 함께 했던” 환경은 그를 자연스럽게 복잡다단한 음향과 음악의 길로 이끌었다. 플루티스트였던 어머니, KBS 클래식FM을 진행하신 아버지는 그에게 선천적, 후천적 자질을 줬다. 그가 프로 데뷔 전 가장 처음 녹음한 음반도 어머니의 것이었다.

톤마이스터로 이름을 알린 음반은 2002년 헨슬러 레이블에서 출시한 R.슈트라우스의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음반이다. 존 피오레가 지휘하는 뒤셀도르프 심포니커의 연주 앨범으로, 거장 피아니스트 게르하르트 오피츠가 협연했다. ‘20대 동양인’ 프로듀서로는 유례없는 기회였다.

“20대 지휘자도 드문 클래식 음악계에서 20대인 프로듀서, 게다가 동양인에게 톤마이스터 역할을 맡기는 것이 드문 일이라 저도 굉장히 놀랐어요. 이 일을 하게 해준 것도 대단하죠. 첫 번째 녹음을 보낸 뒤 게르하르트 오피츠가 너무나 고맙다면서, 몇 군데를 수정했으면 좋겠다고 정중히 적은 손편지를 보내줬어요. 지금도 잊지 못하는 일이에요.”

지난 20여년간 그의 이름 뒤로 무수히 많은 음반이 쌓였다. 이전엔 “수많은 시도에 일주일씩 밤을 새기도” 했다. 그는 “보통 일만 시간의 법칙이라고 하지만 톤마이스터라는 직업 세계에서 그것은 통용되지 않는 이야기”라고 했다. “꾸준히 노력해야 하고, 노력하더라도 잘 안 될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나도 전부 알 수도 없는 세계”라고 한다. 최 감독은 지금도 모든 녹음현장에서 초심으로 향하고, 직업의 의미를 곱씹는다.

“톤마이스터는 언제나 연주자를 빛내주는 사람이에요. 연주자 위에 군림해서도, 연주자보다 돋보이려 해서도 안돼요. 우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연주자가 가장 빛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걸 잊어선 안돼요.”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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