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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딸의 10주기 시집이 유고 시집으로…이어령 “‘네가 간 길을 지금 내가 간다”

‘사진처럼 슬픈 것도 없더라/손을 뻗어도 다가오지 않는 너’‘(‘사진처럼 강한 것은 없다’),‘착신음이 들리면 혹시나 해서/황급히 호주머니에서/전화기를 꺼낸다’(‘전화를 걸 수 없구나’),‘세수를 하다가/수돗물을 틀어놓고/울었다/남이 들을까 몰래 울었다’(‘지금 몇 시지’)

지난달 26일 타계한 이어령 이화여대명예석좌교수는 딸 이민아 목사의 10주기를 앞두고 시집을 준비했다. 2012년 3월15일 암으로 세상을 뜬 딸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담아낸 시를 정리하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공을 들였다. 표지와 구성, 엮음새까지 손을 봤지만 끝내 유작으로 남게 됐다.

표제작 ‘헌팅턴 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열림원)는 이 곳에서 만날 수 없는 딸의 실체를 딸이 살았던 헌팅턴 비치에서 찾고자 하는 짙은 그리움을 담고 있다.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살던 집이 있을까/네가 돌아와 차고 문을 열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네가 운전하며 달리던 가로수 길이 거기 있을까/네가 없어도 바다로 내려가던 하얀 언덕길이 거기 있을까/바람처럼 스쳐간 흑인 소년의 자전거 바퀴살이/아침 햇살에 빛나고 있을까’

이번 시집은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이후 두 번째 시집으로 모두 4부와 부록으로 구성됐다. ‘까마귀의 노래’는 신에게 나아가 얻은 영적 깨달음과 참회를, 2부 ‘한 방울의 눈물에서 시작되는 생’은 모든 어머니에게 보내는 감사와 응원을, 3부 ‘푸른 아기집을 위해서’는 자라나는 아이들의 순수와 희망을,4부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로 구성됐다.

시집은 따뜻한 것, 부드러운 것, 사랑과 생명에 대한 희망과 꿈, 기도로 점철돼 있다.

추위를 이겨내기 위한 어머니의 겨울 이야기 같은 따뜻한 가슴, 허들링으로 벽을 만들어 눈보라를 막는 펭귄 같은 배려와 온기, 내 아이에게 하듯 남의 아이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 ‘내일은 없어도 모레는 있다’는 희망, 아기들이 살아갈 푸른 지구를 위한 다짐들이 가득하다.

또한 활이 아닌 하프로 죽음이 아닌 생명의 노래를 부르라고 권하는 시인, 부드러운 혀가 딱딱한 이를 이기듯, 부드러운 물이 딱딱한 바위를 이기듯이 작고 부드러운 것이 이긴다는 진리를 전하고자 한다.

고인은 생명이 소멸돼가는 와중, 서문을 목소리로 남겼다고 한다.

‘네가 간 길을 지금 내가 간다/그곳은 아마도 너도 나도 모르는 영혼의 길일 것이다/그것은 하나님의 것이지 우리 것이 아니다’

그의 삶의 엔딩 크레딧같은 시집이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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