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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은 어엿한 선진공여국...질적성장 넘어 양적성장 이뤄야” [헤경이 만난 인물-송민현 KOICA 사업전략·아시아본부 이사]
코이카 원년멤버로 해외원조 30년
원조금액 174억→1조원으로 급성장
첫 발령지는 직원 두명의 印尼사무소
전쟁 중인 아프간 등 험지근무 도맡아
개도국 상황 잘 접목한 ODA로 정평
미국 등 국제사회 협업 요청도 쇄도
스마트시티·그린모빌리티 상생모델로
한국 특기인 디지털·그린 뉴딜 집중
송민현 이사가 걸어온 길 ▷1990년 중앙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1991년 한국국제협력단 입사 ▷1997년 코이카 인도네시아 부소장 ▷2002년 코이카 아프가니스탄 부소장 ▷2007년 코이카 스리랑카 사무소장 ▷2010년 코이카 홍보실장 ▷2016년 코이카 평가실장 ▷2017년 코이카 예산기획실장 ▷2019년 코이카 필리핀 사무소장 ▷2021년 코이카 사업전략 아시아본부 이사

“1997년 첫 해외 발령으로 당시 인도네시아 사무소에서 일하게 됐는데, 그때 한국의 해외원조 규모는 일본의 1/100 정도였습니다. 당시에는 인도네시아 사무소라고 해도 소장과 직원 단 두명밖에 없었습니다. 이랬던 우리나라가 지금은 선진국 중에서도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니 ‘엄청난 성장’이라 말할 수 있는 거죠.”

지난 1991년 4월 1일, 우리나라의 개발협력 사업을 총괄하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 코이카)이 설립된 지 올해로 30년이 됐다. 당시 174억원 규모에 불과했던 개발협력 예산은 30년 동안 성장하며 현재는 1조원을 바라보고 있다. 각국에 설치된 현지 사무소 역시 6개에서 출발해 현재는 44개국으로 확대됐다.

사실상 우리 정부의 해외원조사업 시작과 함께 설립된 코이카의 성공에는 분쟁 지역을 가리지 않고 현지에서 개발협력사업을 수행한 직원들이 있었다. 특히 송민현 코이카 사업전략 아시아본부 이사는 지난 1990년 코이카의 전신인 한국해외개발공사에 입사해 코이카의 시작과 함께한 ‘창립 원년 멤버’다.

지난 7일 서울 광화문에서 헤럴드경제와 만난 그는 유혈 사태가 한창이었던 인도네시아부터 전쟁이 계속됐던 아프가니스탄에서 근무하는 등 험지를 도맡아온 것으로 유명하다. 송 이사로부터 설립 30년을 맞은 코이카의 발자취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들어봤다.

지난 1990년 중동에 근로자를 파견하고 미국과 캐나다, 호주를 대상으로 투자이민 사업을 진행했던 한국해외개발공사에 입사했던 송 이사는 “주변에서 추천해 들어가게 됐는데, 그렇게 입사한 공채 동기 16명이 코이카 막내가 됐다”며 당시를 설명했다.

그는 “중동 근로자 파견 사업 등은 당시 사양산업이었다. 세계의 원조를 받던 우리 정부가 이제는 해외개발협력 사업에 나서야 한다는 계획을 세웠고, 이를 총괄하기 위해 코이카 설립이 논의됐다”라며 “입사 1년 만에 코이카가 설립됐고, 사실상 개발협력 사업을 공부해가며 지금까지 함께 일해왔다”고 했다.

전공을 살려 입사 후 7년 동안 홍보 업무를 해왔던 그는 지난 1997년 처음으로 인도네시아 현지사무소로 발령받으며 본격적인 첫 해외개발협력 업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듬해 현지에서 대규모 폭동이 발생하며 송 이사는 현지 교민 귀환 업무에 투입됐다. 그는 “현지에 머물고 있는 단원들과 함께 현지 교민들을 피신시키고 한국으로 돌려보내는 지원 업무를 계속했다. 인도네시아에서 근무한 2년이 사실상 ‘비상근무’였는데 대사관, 단원들과 함께 어느 나라보다 우리 국민을 빨리 소개시킬 수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송 이사가 다음으로 맡은 국가는 한국대사관조차 없던 아프가니스탄이었다.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이 한창이던 2002년 아프가니스탄에 도착한 송 이사는 “당시 탈레반이 도망친 아프간의 재건 사업이 중요했던 시기였다. 다른 선진국 공여기관과 함께 아프간에 도착해 한국대사관 설치부터 도와줬는데, 대사관보다 코이카가 먼저 현지에 설치된 유일한 사례”라고 설명했다.

그는 “탈레반 세력이 잔존했던 칸다하르 지역은 아침 일찍 방문해 현지인을 돕고 정오에는 쫓기듯 돌아가야 했다”라며 “현지 구호지원 사업에 애를 먹었다”고 했다.

위험한 환경 속에서도 코이카는 아프간 재건에 앞장섰다. 특히 전쟁으로 무너진 사회인프라를 다시 회복시키며 재건 과정에서 역할을 선진국으로부터 인정받기도 했다. 송 이사는 “미국과 유럽이 아프간 재건 과정에서 ‘공무원 역량 강화’에 집중했다면, 우리는 역량 강화와 동시에 그들에게 꼭 필요한 긴급 인프라 재건까지 함께 도왔다”라며 “아프간 내 병원과 학교, 발전소까지 지었다. 우리가 지어준 시설들을 아프간 최초의 현대화된 시설이었고, 나중에는 선진국들도 그런 노력을 인정해줬다”고 말했다.

지난 2013년 슈퍼 태풍 ‘하이엔’이 필리핀을 강타했을 때는 정부 대표 선발대로 방문해 구호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미군이 지원한 C-130 수송기를 타고 현지에 도착하니 외국 구호대 중 한국 선발대가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을 알았다”라며 “가장 먼저 지역 병원을 활용해 성공적인 구호활동을 펼친 것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고 덧붙였다.

주요 구호 현장을 오간 송 이사는 최근 우리나라의 개발협력이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정도가 됐다고 평가했다. “최빈국에서 선진공여국으로 탈바꿈한 최초의 나라가 대한민국”이라고 강조한 그는 “우리나라의 공적개발원조(ODA) 지원액은 경제협력개발기구 개발원조위원회(OECD DAC) 29개 회원국 가운데 16위에 해당하고 연평균 증가율은 9.7%로 회원국 중 2위”라며 “국제사회에서도 ‘개도국 현지 상황에 맞게 잘 접목한 ODA’라는 호평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개발협력 분야에서의 위상이 증가하며 국제사회의 협업 요청도 늘어나고 있다. 지난 5월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양국 간 개발협력이 주요 의제로 채택됐다. 선언문에도 ‘KOICA-USAID 협업 확대’가 명시됐다.

아프리카에서는 르완다가 ‘원조 수용성’이 높은 나라로 한국을 지목해 발전 모델로 삼고 있고, 지난 2018년에는 아프리카 최초로 LTE(고속무선데이터통신) 전국망을 구축하는 등 한국과의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송 이사는 “이제 코이카가 선진원조기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질적 성장이 이루어졌다는 방증”이라며 “실제로 현장에서 역시 유수의 유엔 등 다자기관, 선진국의 양자원조기관으로부터 협업 러브콜이 쇄도 중”이라고 했다.

다만, 개발협력의 양적 성장 면에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숙제도 있다. 그는 “국민총소득(GNI) 대비 우리의 원조 규모는 아직 0.14% 수준으로, 유엔의 권고수준(0.7%)에 한참 부족한 상황”이라며 “당장 1960년대부터 세계에서 원조 규모 순위권을 다퉈온 일본이나 최근 영향력을 넓히고 있는 중국과는 비교되지 않는 규모”라고 지적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송 이사는 앞으로의 개발협력 발전 방향에 대해 “국제사회가 약속한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속에서 우리 정부의 계획에 맞춰 발전 방향을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특히 우리 정부가 중점을 두고 있는 그린 및 디지털 뉴딜에 집중해야 한다. ‘스마트시티’와 ‘그린모빌리티’는 좋은 상생 모델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우리 정부의 개발협력 효율성에 대해서도 그는 “선진국 수준에 맞춰야 한다”고 했다. 지난 1991년 각 정부부처에 산재됐던 개발협력 업무를 한 곳에 모았던 것이 코이카의 시초지만, 최근 각 부처가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개발협력 업무가 크게 늘어 현재 우리나라 무상원조의 53%만을 코이카가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송 이사는 “현재 주요 선진국은 개발협력 전문기관이 80%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라며 “다른 나라 공여기관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것이 앞으로의 역할”이라고 했다.

유오상 기자·사진=이상섭 기자

osyo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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