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대중화’.되레 삶과 분리
인문, 과학 이분법 주장은 사기
과학자들, 사회현상에 발언 높여
‘상식의 긴 팔’ 과학의 자리 찾아야
김 교수,‘과학적근거위원회’ 설립 제안
일상 위협 비과학적 태도 감시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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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문화라는 개념을 과학자의 삶과 분리하려던 한국 과학대중화 세력의 노력은 결국 유치하고 수준 낮으며 일회성 행사로 그치는 과학대중화 강연 시장과, 영재교육의 일환으로 오직 유치원생과 초등학생만이 수행평가와 유흥을 위해 방문하는 과학관 등의 기괴한 문화를 창조해냈다.”(‘과학의 자리’에서) |
[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과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요즘이지만 과학은 여전히 사회와 동떨어진 그들만의 커뮤니티라는 인식이 강하다. 사람들이 부대끼는 사회와는 좀 다른, 연구실에 갇힌 세계로 여겨진다.
이런 과학의 이미지는 어떻게 만들어진걸까?
27년간 과학자로서 인문주의자로서 살아오면서 과학의 자리를 고민해온 초파리·꿀벌 유전학자 김우재 하얼빈공대 생명과학센터 교수는 그 이유를 산업화 시대, 과학이 정치와 경제에 종속, 제대로된 과학의 과학화가 이뤄지지 않은 데서 찾는다.
서양에서 근대과학의 탄생이 18세기 계몽주의 철학과 역사 등 거의 모든 학문에 영향을 미치고 과학논쟁을 불러일으킨 것과 달리 한국은 근대과학을 제대로 받아들일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인문사회학자들이 서양사상사의 일부만 수용, 과학을 배척하는 학술생태계를 구축함으로써 과학이 정치 사회 문화에서 소외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주장이다.

김 교수의 오랜 연구와 사유의 결과물인 ‘과학의 자리’(김영사)는 이런 ‘과학의 문제’를 인문학자의 시각이 아닌 과학자 스스로 사회적 논의의 장에 세웠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과학기술인들의 정치 인식 부재를 비판, 사회현상에 깊은 관심과 발언을 촉구한 점이 눈길을 끈다.
저자는 과학이 근대학문으로서 새로운 사회적 의미를 발견해나가는 게 아닌 기술적 도구로 전락한 한국 과학의 형성과정을 짚어나가는데, 특히 박정희 정권에서 과학대중화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한국과학기술총연합회(과총)를 지목한다. 과총이 ‘정권의 시녀’로 전락, 과학의 정치적 종속을 주도했다며, 이는 지금의 한국과학창의재단도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역사적으로 과학과 진보정치가 결합한 서구와 달리 한국의 진보진영에게 과학은 낯선 미지의 영역으로,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도 비판한다.
과학자 사회가 단 한 번도 주체적인 공동체를 구성하지 못했던 한국사회에서 과학은 대중화라는 유치한 방식으로만 사회에서 소비됐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과학자들 일부는 엔터테인먼트 사업의 피에로가 되어 사회적 의제에 대한 발언에는 소극적이고, 과학을 일종의 자기홍보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연예인이 되었다”는 그는,“과학자는 과학을 쉽게만 설명하는 피에로가 아니라 사회적 맥락 속에서 사회적 변화를 실천하는 과학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바로 기술자가 아닌 지식인으로서의 과학자의 역할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과학의 기능은 사회를 지탱하는 ‘상식의 긴 팔’로서의 역할이다, 이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새로운 세계관 혹은 새로운 삶의 양식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과학의 혁명적 발견보다 가치가 더 크다고 본다.
저자는 한국 사회의 과학이 우리의 삶에 봉사하게 만드는 방식은 과학의 대중화도 대중의 과학화도 아니다며, 과학이 삶에, 정치권력에 녹아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과학의 과학화, 과학을 과학답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과학자가 정치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치권력이 의사결정 과정에서 과학의 도움을 받고 과학적 방법론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의미다. 즉 과학적 삶의 양식인데, 과학이 자연을 발견하는 방법론과 규범으로서의 미덕이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삶이다.
사실, 국가 주도의 과학기술정책이나, 국민의 삶을 담보로 하는 각종 정책 입안과정이 비과학적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저자는 “법안이 만들어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엄격한 과정은 사라지고, 언젠가부터 법안은 여와 야가 협상하기 위해 필요한 포장지가 되었버렸다”고 지적한다. 이는 과학자를 국회에 더 보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삶의 양식으로서의 과학을 주창하는 책은 과학의 사회적 역할과 의미를 증명하기 위해 근대과학과 계몽주의, 낭만주의, 논리실증주의로 이어지는 서구 지성사의 계보를 치밀하게 탐구한다. 인문과 과학이라는 이분법, 대립은 애초에 없었다.
계몽주의 시대 위대한 사상가들은 철학자인 동시에 근대과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서양사상사 역시 과학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볼테르는 철저한 뉴턴주의자로 이성적 방법론을 부정이 만연한 프랑스 사회에 적용하고자 했으며, 칸트는 수학, 물리학 등 근대과학의 결과물을 철학에 이용했다. 마르크스 역시 과학처럼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상을 정립하고, 과학화하려 했다.
이 책의 특별함은 ‘과학적 사회와 사회적 기술-한국과학기술의 새로운 체제’란 별책 부록에 있다. 한국 대권후보들에게 던지는 화두, 한국사회의 과학화를 위한 제언이다. 저자는 이를 위해 구체적이고 치밀하게 정책적 실행의 밑그림을 그린다. 그 중 하나가 국가인권위원회와 공정거래위원회의 중간 형태인 ‘과학적근거위원회’의 설립이다. 이 위원회는 법률과 정책,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사고의 과학적 근거를 조사하고 이를 권고하는 기능을 갖는다.
일상을 위협하는 비과학적 태도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역할이다. 과학이 문화로 아직 자리 잡지 못한 한국사회에서 이를 제도적으로 보완하는 장치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삶의 양식으로서의 과학화는 이념적 갈등으로 쪼개진 한국사회에 더 절실해 보인다.
과학의 자리/김우재 지음/김영사
mee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