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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병활동 등 실천하는 안향의 후예들...150점 문집·자료 ‘인문학 가통’ 계승 [남도종가의 재발견]
죽산안씨 문강공파 은봉종가
선비의 겸손함이 느껴지는 은봉종택의 질박한 풍경.

‘도학과 절의는 둘이 아니다.’

배움을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는 은봉 안방준(1573∼1654)의 지론은 안향의 후예 다웠다. 죽산안씨 은봉종가는 학문을 벼슬길에 활용하기 보다는 지혜를 담은 서적의 보급, 의병활동 등 실천을 택했다.

안씨 가계가 은봉까지 이어지는데는 영주, 안성, 담양, 장흥, 보성 등으로 경로가 여러번 갈린다. 안씨는 순흥(영주)을 본관으로 하는 시조 안자미 이후, 7세손인 죽성군 안원형(1318~?)이 죽산(안성)안씨를 분적해 연다. 안원형은 고려에 성리학을 전파한 안향(1243~1306)의 증손자이다.

안원형이 외가인 광주 평장동(현재 담양 평장리)에서 말년을 보내면서 남도와의 인연을 맺게 된다. 안원형의 5세손 안여주가 장흥에 정착했고, 그의 둘째 아들 안민(?~1467)이 보성선씨와 혼인해 보성에 입향함으로써 보성파 중시조가 된다.

안축(1500~1572)은 사헌부지평·나주목사·남원부사를 지낸뒤 낙향해 학문에 매진한다. 김인후·임억령과 함께 ‘호남의 三高(높은 선비)’로 불린다.

은봉종가를 연 안방준은 안축의 손자이다. 안방준은 벼슬 천거를 전부 마다하고, 우산전사와 은봉정사에 학당을 열어 70여명의 제자를 두고 학문연구와 집필에 매진하다가 임진왜란 때 스승 박광전 의병장의 연락관으로 참전했으며, 정묘호란, 병자호란때엔 호남의병장으로 항전했다.

안방준은 왜란과 사화에서 얻는 반면교사의 교훈을 ‘진주서사’, ‘임진기사’, ‘노량기사’, ‘항의신편’, ‘혼정편록’, ‘기묘유적’, ‘기축기사’ 등으로 남겼고, 조헌의 ‘동환봉사’, 성혼의 ‘위학지방’을 간행했다. 호남 유림들은 도학과 절의를 겸비한 안방준을 대계서원에 제향하고 ‘은봉전서’ 목활자본을 발간했다.

공부만 한 것은 아니다. 후대가 은봉조대라고 이름붙인 우산리 보성강변에서 유유자적하며 낚시도 했다. 후손들은 이곳에 그를 기리는 빙월정을 짓고 손님을 맞았다.

후손들도 150여점의 문집과 자료를 남겨 인문학 가통을 계승했다.

안규홍(1879~1910)은 구한말 의병장이다. 1907년 정미의병으로 승승장구하다 3년뒤 순국했다. ‘머슴 의병장’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어릴적 아버지를 여의고 남의 집 일을 돕는 허드렛일을 하던 중 을사-정미조약 무렵 의병에 투신했다. 함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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