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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화에 월백하고, 가마귀 검다..이조년의 후예들 [인문학종가]
보성 성주이씨 참의공파 종가
환난을 구휼하고 빈민들을 돕기도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고택에 대한 탐구과정에선 숱한 인문학을 접할 수 있다. 보성 성주이씨 참의공파 종가는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이조년의 다정가(多情歌)와 ‘가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마라’ 이직의 오로시(烏鷺詩)로 유명하다.

보성 성주이씨 참의공파 가내마을 입구의 서재필기념공원에서 보이는 주암호. 서재필은 외가인 이 가문에서 나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남도일보, 서정현 선임기자]

남녀노소 누구든 국어-문학시간에 배운 것이라, 대학별고사-예비고사-학력고사-수능시험 10~80 모든 세대가 공감하는 시이다.

성주이씨는 신라 문성왕 때 재상 이순유를 시조, 11대손인 고려 고종때 경북 성주의 호족 이장경을 중시조로 삼는다. 이조년(1269~1343)은 이장경의 5남으로 대제학에 올랐다.

이장경의 차남 이천년의 아들 이승경이 원나라에서 공적을 쌓아 현지에 세거(농서이씨)했고, 임진왜란 명나라 지원군 대장 이여송(1549~1598)이 그 후손이라 한다. 이여송은 재중교포인셈이다.

보성 성주이씨 참의공파 종가에 서 있는 다정가(이조년) 시비.

이조년의 증손자 이직(1361~1431)은 조선개국, 왕자의난 평정으로 두번의 공신과 영의정에 올랐다. 그의 오로시는 조선개국 세력을 가마귀, 부패한 고려를 지탱하려는 세력을 백로에 빗대, 가마귀 속이 흴 수 있고, 기실 백로는 겉만 희고 속은 검다고 힐책한다. 양측의 시시비비 따져 본 것이다. 그래서 반대파 회유 목적이던 이방원의 하여가(이런들 어떠리..)와는 다른 뉘앙스다.

보성과의 인연은 임진왜란 이후 이성(1562~1629)이 맺는다. 이항복, 안방준과 동문수학하던 중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출사건이 일어나자 보성 출신 안방준(1573∼1654)을 따라 보성 문덕에 은거했다.

참의공파는 다시 5대가 지나 이직의 12대손 이국진(1738~1781, 이조참의 추증)이 열었다. 그의 아들 이유원은 보성 문덕면 주암호 지류의 망일봉 아래 가내마을에 터잡았다.

책읽는 집안 답게 이유원의 아들 이기대(1792~1858,호는 가은)는 1만여권의 서책을 갖추고 가은당, 천상재, 일감헌 등 세 학당을 설립, 추사 김정희, 노사 기정진, 면암 최익현 등이 학문을 탐구하고 후진을 양성토록 했다. 흉년에는 양곡을 내어 구휼하고 향약을 조직해 환난을 대비했다.

이기대의 장남 이지용(1825~1891, 호는 소송)은 금부도사, 석성현감 등을 지냈다. 가재를 털어 빈민을 보살핀 사실이 임금에 보고돼 조선왕조실록에 기재됐고 기정진의 찬사를 받았다.

이기대의 5녀가 서광언과 혼인, 친정에서 아들 서재필(1864~1951)을 낳았다. 주암호에서 가내마을로 향하는 입구에는 서재필 기념공원이 조성돼 있다.

이지용의 아들 이교문은 노사 기정진 휘하 호남의병장이고, 이일은 기우만의 문인으로 항일의병들에게 총을 공급하며 구국에 기여했다.

보성 성주이씨 참의공파 종가

이기대와 자손 4대는 ‘가은실기’, ‘소송유고’, ‘일봉집’, ‘소봉집’등을 남길 정도로 학문탐구과 구국활동 모두 소홀히 하지 않았다.

가내마을에는 박사 27명을 키운 자부심이 흐르고 있다. 대대로 명문장을 배출한 성주이씨 참의공파 종가는 영의정 이직의 지론 ‘검소’를 가훈으로 받든다. [자료협조:남도종가회, 보성 성주이씨 참의공파 종가, 남도일보]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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